아, 사랑 참 얄궂구나.
처음엔 어떤 소설인지 몰랐는데,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였구나…
역시나 책은 (무경계는 더욱) 날 새로운 곳으로 안내를 해준다.
공상과학의 세계로, 아마존 숲으로, 역사의 한 장면으로..
이번에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세상으로 날 (강제로) 데려다주었다.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고,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고, 사람은 역시 다양한 감정을 가진 존재구나 싶었다.
문화 평론가의 해설은 마치 언어영역 시험문제 같았다.
그냥 내가 느끼는 것이지, 그걸 문장 하나하나 분석하고 억지스러운 해석을 한 것 같아서였다.
오히려 책 뒷면에 있는 김하나 수필가의 평이 훨씬 좋았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빠르고 가벼워 보인다. 그러나 빠르다고 해서 남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가볍다고 해서 진짜가 아닌 것도 아니다. 당신은 현란한 게이스러움에 혀를 내두를 수도 있고
그에 따르는 ‘경박함’에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결코 할 수 없을 한 가지는 이 이야기를 읽다 마는 것이다.”
어떤 책이든 중간에 웬만하면 멈추기 어렵다. 그것이 소설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난 독서모임에 참석해야 하기도 하니깐!
새로운 정보를, 시각을 주었기에 이 책은 그것만으로도 제 값은 했다.
[왠지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본다]
-작가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묘사는 불가능하다
-비록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서 이미 남자(아니 사람)의 남자(사람)에 대한 사랑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섹스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아주 조금 나아진 듯 하지만)
-어쩌다 보니 사회적 약자인 그들은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많겠구나 싶었고, 그렇게 된 것에는 환경적인 요소가 크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깐.
-그렇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너무 비관적으로 또는 막 사는 모습은(소모적인 만남, 섹스들) 별로였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보편적인 것이 정상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나이 먹은 띠동갑 아저씨든, 첫째 만을 끔찍이 아끼는 규호의 어머니든, 악바리 같은 주인공의 어머니든.
-답답하고, 왜 그러느냐 따지고 싶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비비 아저씨도…
-에이즈에 걸리다니.. 안타깝다. 아픈 건 어찌 되었건 좋지 않다.
-물론, 잘 관리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암을 이겨낸 주인공의 엄마처럼 가능하면 좋겠다.
[책을 읽다가 괜찮은 문장 등을 적어본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꽁치 말고) 당신이라는 우주를요.
-비슷한 생각을 하면 나이 차이가 줄어들기라도 해?
-해물에 미쳤어요? 전생에 상어였어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고 일방적인 연락이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왈칵 반가워하는 내 마음이 싫었지만 그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우리 만날까? 지금 만나고 있잖아. 꼭 두 번 말하게 해. 무슨 뜻인지 알면서
-너를 낳고.. 너를 안고 있으면.. 배가 부르고 행복하고 그랬어. 그래서 자꾸만 겁이 나더라. 다치거나 부서지거나 없어질까 봐.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삶의 불이 꺼지고 나니 이상하게 나 자신이 나에 대해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의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먹고살았는지,
쉴 때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불을 켜기 위해서 어떤 것들을 해나가야 할지…
인생에 뚜렷한 지표나 청사진이 없어진 적이 처음이었고, 그래서 지독한 무능에 빠진 기분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