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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송 Oct 01. 2024

내 스승은 가전 김호석 화백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들어 주실래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내가 전공을 정했던 2학년일 때, 우리 스승님은 학교에 새로 부임하셨다. 그리고 한국에서 최고로 호분 잘 쓰는 사람, 그리고 초등학교만 나온 무형문화재 단청장. 채색화는 조르주 쇠라처럼 병치혼합을 하시는 분으로 시간강사진을 꾸리셨다. 우리 스승님이 그 학교에 계속 계셨으면 대한민국에 좋은 작가들이 참 많이 나왔을 거다. 그리고 2009년에도 이미 유명하셨지만, 지금은 어마어마해진. 한 팔이 없어도 독학으로 그림 짱먹은 박대성 화백님을 특강으로 초청해 실경산수 그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스승님은 파란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려면 농사를 짓는 것부터 했다. 150평짜리 쪽 농사. 선배, 동기들과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가루를 내고 물감을 만들었다. 한약방에서 민어부레 구해오라는 미션도 주셨고, 몇 년 동안 쑨 고풀을 직접 만질 수 있는 기회도 주셨다. 아교포수와 풀의 질이 왜 중요한지 본질을 알려주셨다. 배접법을 알려주셨고, 화판은 무조건 200호로 해야 한다고 했다. 두께가 아주 두꺼운 뼈다귀 화판을 쓰면서 끝도 없이 초배지를 붙이며 도배를 엄청나게 했는데, 그 뼈다귀 화판은 지금은 구할 수도 없다.



정말 정석으로 전통회화를 배웠다. 전국에서 세상 풍경 좋은 곳은 답사로 다 다녔다. 실경산수를 했다. 우리는 배낭을 매고 먹과 화첩, 종이를 챙겨 부여 낙화암에서, 강릉 경포대에서 한지를 깔고 목탄으로 스케치를 하고 수묵산수를 그려내었다. 나는 미대입시 경력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미대가 다 이런 방식으로 수업하고 큰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었는데,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짧았던 미대입시 경력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스승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흡수하는데 온 신경을 곧추세우며 그림을 그렸다. 



스승님은 그 시절 유래 없이 좀 쎘다. 물론 지금도 쎄다. 그 당시 스승님이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 새로 회화 전공 설비들이 엄청나게 들어왔다. 나는 이제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재료비나 연구비로 뒷돈을 빼돌리고 있을 때, 그 어마어마한 돈을 하나도 빼돌리지 않고 제자들을 위해 최고의 마베프 이젤을 몇십 개나 사서 1인당 하나씩 배분해주고, 배접대를 구비하고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종이를 사주셨다는 걸. 학교가 생긴 이래 없었던 성과를 부임 1년만에 어마어마하게 해내셨다는 걸. 














제자들은 스승님을 버거워했다. 물론 나도 되게 버겁긴 했는데, 우리 부모님이 쪼우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들이라 평생 들들 볶이면서 사는 데 이골이 나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만 다른 선후배나 동기들에 비해 스승님의 성격을 엄청 잘 버텼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남에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다 할줄 알아야 한다고. 진짜 멀티가 되어야 했고 실습실에 안 앉아있으면 전화해서 불호령을 내렸다. 사정 봐주는 거 없었다. 다들 밥 먹고 다른 거 하지 말고 죽도록 그림만 그려야 했다. 주말? 집에도 못 가지, 당연히.



재밌었다.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그렇게 무언가에 몰두해 본 적이 없었다. 내 그림을 칭찬해주시는 게 좋았다. 나는 미대입시 기간이 짧고, 동기들은 아빠 교수 아니면 무형문화재, 집안 도예가. 입시미술 오래 한 애들무지 많고. 나는 미술하는 애 치고 성적이 좋아서 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고, 그림은 사실 여기 와서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데. 스승님은 나에게 자주, 천재냐고 했다. LSE에 다니는 언니와, 토익공부 2달 하고 990점 받는 남동생에 비해 공부 못해서 늘 구박받고 자랐는데. 나보고 천재래. ㅋㅋ



나는 정말이지 스승님을 믿고 따랐고, 한 마디라도 더 듣고 흡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쫓아다녔다. 스승님은 청렴한 사람이었다. 아유 조금 탁하기라도 하시지, 너무 깨끗하고 투명해 다른사람이 한 방울만 떨어트려도 바로 오염이 태가 날 만큼 너무나 맑았다. 그래서였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셨다. 억울하게 무언가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추악함을 깨끗한 사람이 대신 지어야 하는가? 옳지 않다. 부당했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싸웠다. 



시간강사 자리 줄게, 조교자리 줄게, 대학원 추천서 써 줄게, 취직시켜줄게라는 이야기들에 흔들려 스승님을 저버릴 때 나는 끝까지 정의를 택했다. 그들을 이해할 순 없지만 다들 어렸다. 아쉽다. 세상에 처음으로 내가 잘할 수 있고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게 그림이라 너무 행복했는데, 꿈이 끝났다. 그림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그릴 수가 없었다. 상황이 그랬다. 마지막으로 전시를 보러 갔을 때, 빨간 그림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람이 아닌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나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그 때 다시 그림을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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