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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한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 집 냉장고는 정직하다. 열어서 보이는 게 다다. 쌓아놓고 쟁여놓는 습관이 없는 탓에 보관과 저장이 본래의 용도인 냉장고는 우리 집에서 최소한의 구실만 유지하고 있다.

내가 저장을 잘하지 않는 이유는 살림에 원대한 뜻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김치 말고는) 저장의 필요성을 아직 느끼지 못해서이다. 가만히 보면 냉장고에 한번 들어간 애들 치고, 요리가 되기 위해 나가는 애들만큼이나 존재를 잊혀가다 그 형태를 알 수 없을 때가 되어 퇴출당하는 애들도 많다. 그러면서 냉장고 담장자는 다짐한다. “다시는 많이 사지 말아야지.” 그 다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오늘 사 온 것들을 냉장고 안으로 들이밀어 넣는다. “오늘 저녁에 먹을 거야,”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외식을 이길 오늘의 식자재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렇게 오늘의 식자재는 식사 약속이 생길지도 모를 내일의 것이 되고, 다시 모레의 것이 되고,  그렇게 뒤로 뒤로 밀려난다. 냉장고에서 냉동실로, 냉동실 앞쪽에서 뒤쪽으로, 뒤쪽에서 구석으로. 언제 먹을지는 신도 모른다.     

  


나의 엄마는 냉장고에 사람 빼고 다 보관하셨다. 냉장고가 타임캡슐도 아니고 냉장고에 넣기만 하면 절대 썩지 않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시며 남는 음식은 무조건 냉장고에 넣으셨다. 냉동실을 열어보면 몇십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제사상 음식도 나올 각이었다.  제발 버리라고 하면 멀쩡한 음식을 왜 버리냐고 그러면 천벌 받는다고 팔짝 뛰셨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한 엄마는 혼자서 꾸역꾸역 꺼내서 기어이 드셨다. 뭘 섞었는지 알 수도 없는 저것을 무슨 맛인지나 느끼고 드시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절대 맛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 그걸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졌던 사춘기의 나는 엄마의 고집과 저장 강박이 싫어서 내가 커서 냉장고가 생기면 악착같이 텅텅 비워 놓겠다고 다짐했다.    


 


저장. 모으는 것, 나중을 위해 보관하는 것,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 것, 우선 갖고는 있는 것.

저장하고 보는 심리에는 ‘쓸 거야, 언젠간. 필요할 거야 언젠간, 혹시 몰라, 언젠간.’과 같은 불안 잠재우기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언제는 언제인지, 오기는 하는지, 언젠가 필요한 물건이 뭔 줄 알고 미리 저장해놓으면서 당장 필요한 건 없어서 사러 가는 건 뭔지. 몇 개월 동안 필요 없는 물건이 내일이라고, 내년이라고 필요할까? 몇 년 동안 손절한 사람들 번호를 가지고 있다한들 갑자기 내일 연락할 일이 생길까? 지나간 구여친 구남친 전화번호를 몇 개월 몇 년 가지고 있다한들 전화할 일이 생길까? 기껏해야 “자냐?” 이 따위 소리나 할 텐데.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없으면 초라해 보이지만 지나치게 많아도 탐욕스럽게 보인다. 아무리 좋은 것도 쌓아두기만 하면 결국 쓰이지도 못하고 존재감도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건 값어치가 없는 게 아니라, 자기 값어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놈의 언젠가라는 불안함 때문에 무조건 쟁여두고만 있다가 때를 놓쳐 버린 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들, 필요 없는 것들이 되어 저만치 구석에 몰리다 영원히 잊혀지고 만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차릴 만큼만 쌓아놓고 살자. 나의 욕심을 경계할 만큼의 돈, 나의 압도하지 않을 만큼 인간관계, 일상을 해치지 않을 만큼의 일,

그렇지 않으면 내 안의 저장고는 터지기 직전까지 가다 결국 다 토해내고, 그것을 꾸역꾸역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나다. 비빔밥은 맛이나 있지 비벼진 불안과 욕심은 재활용도 어렵다.

언제 갈지, 갈 수는 있을라나, 싶은 그 놈의 천당에 못 갈까 봐 저장하는 데 애쓰지 말고 내가 감당할 만큼의 욕심을 내고 감당할 만큼만 보관하는 것, 이게천당 안 가고 여기서 오래 사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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