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서, 다섯 번째 조각
나는 뭘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할까.
한때 목표 없이 방황하던 날들에 늘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질문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거나 인류의 발전을 위해 큰 의미 있는 일을 해내야겠다는 맘이 들어서라기보단, 그냥 단지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막막해서였다. 어쩌면 늘 정해진 루트에 따라 살아온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또 한 번 인생에도 답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다 원하는 '경제적 자유'라는 꿈조차 꿀 생각을 못했다. 아직 세상의 많은 '좋은 것'들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더 낫은 것'을 추구해야 할 마음이 안 생겼었을까. 삶의 이유가 뭐가 됐든 일단 살아있기 때문에 삶을 계속하게 된다. 상태를 바꿀 만큼의 어떤 힘이나 계기가 있지 않는 이상 현상태를 유지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니까. 가족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만을 놓고 봐도 굳이 삶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이유는 없었다.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충분히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끔은 취미생활 또 가끔은 여행을 다니면서 그렇게 삶은 지속됐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일상이 목표하는 삶이고 만족하면서 살 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느낄지도 모르는 삶의 형태겠지만 내게는 큰 만족도 큰 불만도 없는 그냥 그런 상태였다.
일찍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뤘다면 이런 고민은 할 틈도 없었을까. 아이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려고 했을까. 아직 부모가 돼보지 않아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내게도 사랑하는 가족, 부모님이 계신다. 반 평생 넘게 힘들게 살아오신 부모님이 이젠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조금 더 편하게,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게는 그럴 마음도 책임도 있다. 하지만 자식만을 위해 살아오신 부모님이 내가 성인이 되고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부터는 큰 기대도 큰 낙도 없이 사시는 것을 보면서, 이젠 내 걱정은 말고 취미생활이라도 하라고 하면 이제 와서 뭘 시작하겠냐고 그러신다. 생활고에 지쳐서 일까. 아직은 뭔가를 즐기기에 여유롭지 않다고 생각해서일까. 부모님에게는 내가 전부였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도 꿈을 펼칠 만큼 현실적으로 여유 있는 상태는 아녔으니.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지금의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이 있기까지 온 힘을 다해 애써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고 그런 부모님을 난 존경 한다. 다만, 경제적으로 아주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닐지라도 일상에 대한 소소한 기대와 추구가 있으면 조금 더 즐기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부모님에게도 부모님이라는 역할 이외에 그들만의 인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된다. 부모님도, 동반자도, 자식도 내 인생의 전부를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다고 한들 내 삶의 이유의 전부일 수는 없으니까.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무기력과 매너리즘에 빠져서였을까, 아니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문제인데 내게도 그때가 와서였을까. 산다는 게 이런 건가?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고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일을 했기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와 고단함을 풀기 위해 휴식과 즐거움을 찾게 되고 그러기 위해 또 돈을 쓰고, 결국 노동과 휴식이라는 무한반복의 순환고리인가. 그래서 다들 '경제적 자유'를 이루려고 하는 건가? 적어도 이 무한순환의 고리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경제적 자유'가 삶의 목표인가? 원한다고 해서 다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설령 내게 그 행운이 있어 노력의 결실로 '경제적 자유'를 이루었다면 그다음에는 뭘 하면서 살려고 했을까, 결국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또 그렇게 삶은 지속되었을 텐데 대체 이 하고 싶은 일이란 건 뭘까. '경제적 자유'를 이루지 못하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건가? 만약 노력했음에도 '경제적 자유'를 이루지 못했다면 한평생 그걸 이루기 위해 살게 되는 건데 산다는 게 이런 건가? 그렇게 이런 질문들은 고리에 고리를 물고 내게 찾아왔고 난 그 답을 찾아야만 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라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의 끝은 죽음이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결말은 똑같은데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도 기대도 없어지니까.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지는 인생이 아닌,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어떤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뭘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났고 존재하고 살아가는 이유. 길 옆에 피어 있는 꽃을 보았다. 나무를 보았다. 동물을 보았다. 한 생명의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도 없고 정의를 내릴 수도 없었다. 가령 게임 속 캐릭터처럼 모든 존재가 각자의 역할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한들 현재 살고 있는 시공간의 차원에서는 알 길이 없었다. 모두 각자 태어난 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살아갈 뿐이었다. 사람을 보았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게 된다. 모든 사람의 인생의 궤적이 똑같을 수 없고 각자 삶의 형태는 모두 다르다. 특정 삶의 형태만 의미가 있다고 정의를 내릴 수도 없었다. 어쩌면 '독립적'인 한 개체의 존재 자체만으로는 의미를 따질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의미'라는 것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뜻이나 영향 또는 가치를 말하는 거니까. 한 개인의 선택과 행동이 그 사람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존재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서로 영향을 주는 이런 존재들이 모여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 숨을 쉬는 행위만 놓고 봐도 숨을 쉬기 위해 지구에 존재하는 산소를 흡입하고 내뱉은 이산화탄소는 식물의 광합성의 원료로 쓰인다. 식물이 광합성 과정에서 만들어낸 유기물을 사람과 동물이 섭취하여 우리 몸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로 쓴다. 난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였다. 사회에서의 나의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만들어내는 무언가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소비되고 그 대가로 돈이나 동등한 가치의 뭔가를 받는다.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회사를 위해 제공한 나의 노동력이 월급이라는 가치로 환산되어 내게 돌아오는 것처럼. 동시에 살기 위해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을 전부 직접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돈이나 동등한 가치의 뭔가를 소비하고 얻는다. 월급의 일부분을 생활비로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생산자로서 제공하는 노동력이든 결과물이든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존재해야 가치가 부여되듯이 소비라는 행위 역시 다른 생산자의 노력에 대한 가치 인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를 제공하는 생산자의 역할이든 가치를 소비하는 소비자의 역할이든 살아있기 때문에 하는 행위는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의미가 존재했다. 나는 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위치에서, 자식이라는 위치에서, 언젠가 부모가 된다면 부모라는 위치에서, 친구라는 위치에서, 그리고 사회 구성원의 일원이라는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태어났고 살아야 하는데 어떤 특정 이유, 즉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정해진 답이 없거나 알 수 없기 때문에 내일을 기대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 나의 신분과 역할도 있지만 앞으로 어떤 경험과 체험을 하면서 한평생을 보낼지, 나와 연결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면서 살지는 결국 나의 선택이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똑같은 한평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같은 시간 동안에 나와 연결된 세상에 생산자로서 더 좋은 영향을 주면서, 소비자로서 더 많은 경험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더 좋은 영향'의 범위도, '더 많은 경험'의 다양성도 나라는 존재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이든, 할 수 있는 일이든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를 더 키우기 위해 성장하려고 노력하고 더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