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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Mar 18. 2024

순간의 아름다움, 뮤지컬(3)

어떤 취미는 삶을 지속하게 한다

 공연을 보다 보면 알아두면 쓸데없는 다양한 분야의 얕은 지식이 생긴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극이 대부분이라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같은 음악가나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같은 과학자들의 풀네임부터 그들의 가족관계, 자녀와 조카 이름 등 정말 TMI라고 할 수 있는 정보들까지 알게 된다. 뮤지컬 <파가니니>를 통해 파가니니의 아들이 아킬레 파가니니였고, 뮤지컬 <최후진술>을 통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딸 마리아는 수녀였으며, 뮤지컬 <루드윅>을 통해 베토벤의 조카인 카를이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극 <R&J>를 보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뮤지컬 <랭보>, 뮤지컬 <스모크>를 보고 백석과 랭보와 이상의 시를 찾아보게 되었다. 뮤지컬 <시데레우스>를 통해 요하네스 케플러가 그라츠 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으며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을, 뮤지컬 <아가사>를 통해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갇혀있던 미궁의 이름이 라비린토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극 <올드 위키드 송>과 뮤지컬 <호프>를 보고 독일어 지식이 전혀 없음에도 유대인 강제수용소 정문에 새겨진 '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의미임을 안다. 셰익스피어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564년생 동갑내기였다는 사실을 내가 뮤지컬 덕후가 아니었다면 과연 알 수 있었을까?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로봇 같다고 할 만큼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데,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굉장히 잘 우는 나는 공연을 볼 때 역시 많이 운다. 코로나 시기에는 공연장 내에서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었는데, 공연을 보다가 울면 눈물 때문에 마스크가 축축해져 항상 여분의 마스크를 들고 다녔다. 그래서 눈물을 참으려고 했더니 콧물 때문에 더더욱 곤란해져서 이제는 그냥 눈물이 나오면 나오는가 보다 하고 내버려 둔다. 눈물샘에서 분비된 눈물이 눈물주머니와 코눈물관을 거쳐 코로 배출되기 때문에 눈물을 참게 되면 코로 흐른다는 것 또한 뮤지컬 덕질을 하면서 생긴 궁금증을 해소하려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한창 주말마다 뮤지컬을 보러 서울에 가던 때에는 카드 명세서가 인터파크, YES24, 멜론티켓, 시외버스 요금 같은 항목들로만 가득했다. 일과 사람에 치여 매일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살았던 시절에 미리 예매해 둔 티켓들은 내가 몇 달 뒤까지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우울한 감정들이 많이 나아진 후에도 나는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공연을 보며 풀었고, 공연은 비싸지만 확실한 금융치료를 보장했다. 뮤지컬 덕후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 나는 무조건 많이 보려고 욕심을 부렸었고, 보고 싶은 공연은 많은데 내 몸은 한 개뿐이었다. 주말 낮과 밤을 합해도 일주일에 최대 4개밖에 볼 수 없어 주말 내내 서울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숙박비보다는 왕복 교통비가 저렴했으니까. 저렇게 공연을 보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했다니 새삼 어디서 저런 힘이 나왔던 건지 모르겠다. 지금은 전처럼 무리하거나 욕심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소비 습관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자잘한 소비는 줄었는데 목돈을 쓰는 데는 의의로 주저함이 없어진 것이다. 필라테스 24회에 30만 원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예전 같으면 비싸다, 부담스럽다 했을 텐데 지금은 ‘대극장 VIP석 두 번 가격에 24회면, 나쁘지 않은데?’ 하고 결제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공연 관람을 위하여 땀 흘리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던 내가 꾸준히 운동하며 건강을 챙기게 되었고, 퇴사를 꿈꾸다가도 고정적인 수입원을 포기할 수 없어 꾹 참고 다니게 되었으니 이 또한 덕질의 장점이 아닐까. 하하.


 연 예술 역시 시대의 흐름을 조금씩 반영한다.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했던 폭력적인 장면이나 차별적인 대사들을 바꾸고 고쳐나가고 있다. 뮤지컬 <박열>에서는 등장인물이 고문당하는 장면을 배우의 가학적 행위가 아니라 종이를 찢는 소리와 조명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등장인물이 성폭행당하거나 피를 뒤집어쓰고 구타를 당하는 방식으로 무대 위에 고통을 전시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충분히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사실 원작을 재현한다는 이유로 해당 장면을 고집하며 두는 것은 전통을 중시한다기보다는 게으른 사고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재미있는 점은 젠더프리 캐스팅도 종종 보인다는 점이다. 뮤지컬 <적벽>에서는 조조와 공명, 자룡 등의 배역을 여성 배우들이 맡았고, 연극 <아마데우스>에서는 차지연 배우님이 살리에리 역을 맡기도 했다. 연극 <오펀스>는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는데, 같은 내용의 극인데도 배우들의 성별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전해지는 느낌이 굉장히 달라서 신기했다. 앞으로도 남자 캐릭터의 시련과 성장을 위해 사용되고 버려지는 여성 캐릭터가 아니라, 다양한 역할로 풍부한 감정을 표출하는 여성 주인공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실 대부분의 취미생활이 그렇지만 문화생활은 특히 의식주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이다 보니 공연 관람에 큰 비용을 지출하는 사람을 사치스럽다고 여기는 시선이 늘 존재한다. 음식은 배출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피와 살이 되고, 옷이나 집은 물질적인 것이 남기라도 하는데, 두세 시간 이후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고 곧 휘발될 예정인 취미라니 어찌 보면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자. 공연을 함께 보고 있는 우리는 잠시 후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게 될 순간을 나눠 가지는 중이다. 찰나에 사는 사람들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시간,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가 관객들을 현실에서 극 속으로 초대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 일상이 지겹고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면, 공연장으로 오세요. 한번 놓친 극과 캐스팅은 돌아오지 않는답니다. 뮤지컬 <사의 찬미> 중 우진의 대사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우린 새로운 세상으로 갈 거야, 준비됐어?"


뮤지컬을 보며 알게 된 점

나는 과몰입 오타쿠다.

어떤 취미는 삶을 지속하게 한다.

인간은 협력하며 살 수 있는 존재였다. 비록 내 주변은 아닐지라도.


뮤지컬,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지겨운 일상을 여행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벗어나고 싶은 분

같은 것에 금방 질리고, 매일 새로운 게 필요한 분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예술을 보고 듣고 싶은 분


사진: UnsplashKyle 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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