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인간은 생존 본능 때문에 혼자서 살아 가는 것보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안정적이며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나는 항상 궁금했다. 그런데 왜 사회생활은 인간의 반사회성을 일깨우는 걸까?
나는 화가 많다. 어릴 땐 안 그랬는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많아졌다. 아……, 아니다. 생각해 보니 어릴 때도 화가 많기는 했다. 단지 그때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거나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어른들에게 새파랗게 어린 내가 감히 화를 낼 수 없었던 것뿐.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보통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맞는 말을 하면 처맞는 말 취급을 하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편이 나았다. 어린놈이-, 버릇없는, 되바라진-, 등의 형용사로 시작하는 공격성 발언과 부모님의 안녕을 묻는 말들을 굳이 찾아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물론 욕을 먹으면 수명이 연장된다는 속설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웬만하면 참고 살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할 말을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기다보니 스스로 화가 많아졌다고 느끼는 듯하다. 내가 아는 단어들의 세계가 확장되면서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반골’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거꾸로 솟아있는 뼈라는 뜻을 가진 반골은,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기질을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 외향적인 반골은 아니고 내향적인(?) 반골이랄까. 겉으로는 참고 순응하면서 살지만, 속으로는 잘못된 상황에 대해 인식하고 있으며 언젠가 복수와 혁명을 꿈꾼다. 얼굴은 웃고 있을지 몰라도 속으로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하면서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원수는 반드시 갚는, 아주 집요하고 음침하고 옹졸한 사람이 바로 나다. 코로나가 유행할 때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표정 관리를 안 해도 된다는 점이었다. 정말 짜증 날 때는 마스크 아래에서 욕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입은 웃지 않고 눈만 웃은 적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나한테 말했다.
“언니, 타노스 같아.”
어벤져스 시리즈를 안 봐서 잘은 모르지만, 일단 나처럼 가끔 ‘아…. 그냥 다 꺼졌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곤 하는 인물이 아닐까 한다.
화가 났던 상황들을 떠올려보니, 대부분의 화는 내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겪을 때 발생했다.
왜 저 인간은 지 일을 나한테 시키고 지가 한 것 처럼 하는가?
왜 일을 잘하면 칭찬과 보상이 아닌 일을 더 주는가?
왜 저놈은 내가 바빠죽겠는게 눈이 있다면 뻔히 보일 텐데 나를 불러서 카톡 사진 어떻게 저장하냐 따위를 물어보는가?
화내기엔 미묘하고 참자니 열받는 다양한 일들과 매번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그 상황으로 돌아가 있는 나. 아까 이렇게 말할걸, 하는 수많은 시뮬레이션들. 그렇지만 이미 지난 다음 적합한 대사를 찾으면 뭐 하나. 이미 지났는데. 세상은 동화 같지 않았고 권선징악은 전래동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결말이었다. 묵묵히 열심히 일하면 입을 잘 털고 설렁설렁 일하는 사람들한테 공이 돌아갔다.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과 행복한 삶과의 연관성이 크게 없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진 나는 화가 났고 그렇게 계속 내 속에 화는 녹지 않는 눈처럼 쌓여갔다.
한 때는 ‘저 인간이 왜 저럴까?’하는 근원적 의문의 답을 구하고자 한 적도 있었다. 답이 있을 리 없었다. 또라이가 또라이 짓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겠나. 설령 이유가 있어도 그게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해도 되는 이유는 되지 못하는데. 엄마는 내가 화가 났던 일을 말하면 “그러려니 해, 그럴 수 있지, 해”라고 하는데, 나는 부처님이 아니고 어리석은 중생에 가까우니 화나는 일이 생기면 참고 잊어버리려 하면서도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렇…게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 이 자식아!’ 하고 속으로 외치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식욕이 사라지고 소화가 안 되고 위가 아프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줄이고 싶었지만 어디 그게 볼륨 버튼 누르듯이 줄여지던가. 그러려면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데, 성숙한 시민이라면 화가 난다고 눈앞에 있는 인간의 뚝배기를 깨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직장이든 삶이든 그만두는 극단적인 방법으로나 해결될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책에서 작가님이 마음 챙김 명상을 한다는 내용을 보게 되었다. (불행히도 무슨 책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그동안 ‘명상’하면 요가, 인도, 자아 성찰, 종교, 자연,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가부좌를 튼 자세 같은 게 연상되었는데, 마음을 챙기는 명상이라니 흥미가 생겨 찾아보았다. 마음 챙김(mindfulness)이란 1979년 미국의 존 카밧진 메사추세츠 의과대학 명예교수가 만든 명상법인데,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존 카밧진 교수가 마음 챙김 명상법을 만들 때 한국 스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정수는 한국적이거나 미국적인 것, 불교적이거나 비불교적인 것이 아님을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진실로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온전한 인간이 되어 삶 그 자체를 사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 여러분의 마음챙김이 성장하고 꽃을 피워 날마다 매 순간의 모든 일, 모든 수준에서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를 기원합니다. - 존 카밧진, <존 카밧진의 처음 만나는 마음챙김 명상> 중에서
나라와 종교를 떠나서 오로지 내가 온전한 인간이 되어 삶 그 자체를 사는 것에만 집중하는 명상이라니. 괜찮은데? 그래서 나는 명상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사진: Unsplash의Lesly Juar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