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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Apr 19. 2023

벼락치기 인생의 제과기능사 도전기-필기편(1)

시험 접수한 날 공부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병이 도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무언가 해야 하는 병. 이 병은 주기적으로 도지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뜬금없이 프랑스어를 공부하거나, 한자를 외우거나, 피아노를 연습했다. 증상은 오래가 않았다. 내 의지는 고장 난 엔진 같아서, 급발진했다가도 이내 푸시시 소리를 내며 꺼졌다. 이번에 꽂힌 건 자격증 취득이었다.


 이번 급발진에는 이유가 있었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이끌려 성시경이 제과기능사 자격증을 따는 영상을 보게 된 것이다. 학창 시절 라디오로 푸른 밤을 들으며 수학 문제를 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DJ가 제과기능사 자격증을 따다니. 취미로 시작해서 자격증까지 따는 게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그동안 빵을 구워온 짬이 있는데, 한 번 해봐? 자격증이 있으면 왠지 내가 그동안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음을 인정받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격증은 내 의지가 사그라져도 실체가 남을 테니까. 녹색의 수첩형 자격증을 하나쯤은 가져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결심했다. 좋아, 가보자고.


 그런데 시험 볼 준비를 마친 다음에 시험을 보려고 하면 영원히 볼 수 없을 게 뻔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나에게 ‘완벽히 준비된 상태’는 평생 오지 않을 것이었다. 글을 쓸 때도 쓰고, 다시 쓰고, 주구장창 고쳐 쓰다 힘들면 치워놨다가 생각나면 다시 꺼내서 읽어보고 또 고쳤다. 적당한 선에서 자신과 타협을 해야 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그러니 마감 기한이 필요했다. 자격증을 손에 넣을 때까지 의지가 꺾여도 나를 달려 나갈 수밖에 없게 할 원동력이. 그렇다면 일단 저질러야 한다. 그렇게 무작정 2주 후에 보는 필기시험을 접수해버렸다.


 나는 애매하거나 잘되지 않을 것 같으면 애초에 시도를 하지 않는데, 일단 시작한 거면 어영부영 대충 하는 건 용납하지 못하는 굉장히 피곤한 성격이다. 사실 그렇게 냅다 일을 저지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문제은행식 시험은 자신 있었고, 대학교 때 생물학만 4년을 배웠으니 포도당, 과당, 갈락토오스 등의 용어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심지어 시험은 주관식도 아닌 사지선다형. 내가 30여 년 동안 봐온 시험이 몇 개인데 그래도 60점은 맞겠지 생각했다. 원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내가 아는 게 없다는 걸 알아서 걱정하지, 아는 게 없는 사람은 오히려 용감하다. 시험장이 집에서 꽤 멀어서 두 번 가기 번거로우니, 그냥 같은 날에 제과기능사 필기와 제빵기능사 필기를 모두 보기로 했다. 둘 중 하나는 붙겠지. 둘 다 붙으면 더 좋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유튜브로 볼 수 있는 ‘빵선생의 과외교실’이 유명했다. 시험을 접수한 당일 필기 공부용 책을 샀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쉽지 않았다. 제과기능사 필기 기준으로 보면 시험 항목은 크게 재료 준비, 제품 제조, 저장관리, 위생안전관리로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건 기초재료과학, 재료의 성분과 특징, 미생물의 종류, 식중독 관련 내용 일부에 불과했다. 그제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구나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시험이 다다음 주인데. 내가 판 무덤이니 들어가서 흙으로 찜질을 하던 다시 메꾸던 뭐라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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