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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Apr 06. 2023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라

파운드케이크

 중학교 때, 좌우명을 적어 오는 숙제가 있었다. 좌우명이라고 할 만한 있어 보이는 문구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라틴어 문장을 발견했다. Sin prisa, sin pausa.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말라. 그렇게 그 문장은 내 중학생 시절의 좌우명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의 좌우명은 ‘Que sera sera’였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의 좌우명이 ‘될 대로 돼라’라니 제정신인가 싶을 것이다. 안 그래도 수시용 자기소개서를 검토하시던 담임선생님이 첫 문장에 적힌 내 좌우명을 보시고서 눈을 의심하셨다. 끝까지 읽어보시더니 피식 웃고 통과시켜 주시긴 했지만. 10여 년 전 작성한 한글 문서라 원문은 소실되었으나, 내용은 대략 좌우명 덕분에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 스스로를 몹시 괴롭히는 내가 마음을 좀 더 편하게 가질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아 조회수를 높이는 것처럼 나도 본의 아니게 첫 문장으로 주의를 끈 셈이다. 당시에는 수시 접수에 제한이 없어서 꽤 여러 곳에 지원했는데 결국 논술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한 걸 보면 내 글이 이과생치고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븐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엄마는 할아버지 댁에 가거나 선물할 일이 있을 때면 은박 도시락에 파운드케이크를 구웠다. 후르츠칵테일과 건포도, 견과류가 들어간 약간 퍽퍽한 파운드케이크였다. 건포도도 견과류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그다지 먹고 싶지 않은 빵이었다. 하지만 파운드를 구울 때마다 집 안 가득한 버터 향이 정말 너무, 너무 좋아서 오븐에서 꺼낸 파운드의 냄새를 킁킁 맡다 엄마가 먹기 좋게 잘라놓은 빵조각을 입에 집어넣게 되었다. 먹고 나면 ‘음, 역시 내 취향이 아니군’했지만 냄새를 맡을 때마다 취향이 아닐 걸 알면서도 또다시 따끈따끈한 파운드케이크를 한 입 먹곤 했다. 역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는 제과점에서 선물용으로 파는, 길쭉한 박스에 포장된 파운드케이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파운드케이크를 먹을 때면 슬픈 일도 없는데 목이 메었다. 하지만 베이킹을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파운드케이크도 촉촉할 수 있고, 좋은(=비싼) 재료로 만든 파운드케이크는 정말 맛있다는 것을.


 파운드케이크는 밀가루와 버터와 설탕과 계란이 각각 1 파운드(453.59g) 씩 들어간다고 해서 파운드케이크라는 이름이 생겼다. 파운드케이크의 기본배합률은 밀가루:계란:설탕:버터=1:1:1:1이다. 물론 이 비율대로 만들지는 않고 레시피에 따라 비율을 조정하긴 하지만, 파운드 한 조각의 약 1/4은 버터고 약 1/4은 설탕인 셈이니 놀랍기는 하다. 제과기능사 시험 품목인 파운드케이크는 크림법으로 만든다. 버터를 휘핑하면 공기가 들어가면서 크림처럼 뽀얗게 변하는데, 이렇게 크림화한 버터에 계란을 넣어 섞은 다음 가루류를 넣어 반죽을 완성하는 것이 크림법이다. 식감을 조절하기 위해 별립법으로 만들 수도 있다. 별립법은 노른자와 흰자를 각각 따로 넣는 방식으로, 크림화한 버터에 노른자만 넣고 가루류를 넣은 다음 흰자는 머랭을 만들어 반죽에 섞어준다. 공립법은 조금 더 묵직한 맛이고 머랭이 들어간 별립법은 좀 더 가볍다. 나는 파운드에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다르게 만드는 편인데, 바닐라빈이나 쑥 가루, 캐러멜을 넣은 파운드는 공립법으로, 얼그레이나 레몬, 유자를 넣은 파운드는 별립법으로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


얼그레이 유자 파운드. 유자청을 욕심내어 넣었더니 가라앉았다.


 파운드케이크를 만들 때 가장 주의할 점은 버터와 계란을 섞는 과정이다. 버터와 계란이 1:1 비율이다 보니 크림화한 버터에 계란을 냅다 집어넣으면 서로 섞이지 않고 몽글몽글한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를 ‘분리 났다’고 한다. 오일 층과 수분 층으로 나뉘어 있는 립 앤 아이 리무버를 떠올려보자. 윗부분이 아래로 가도록 거꾸로 뒤집으면 오일 층이 큰 덩어리가 되어 몽글몽글 떠다닌다. 하지만 위아래로 마구 흔들면 큰 덩어리가 작은 기름방울이 되어 마치 섞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분리된다. 이렇듯,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계란과 버터 역시 그렇다. 계란 흰자는 88%가 수분이다. 그러니 계란을 한꺼번에 버터에 넣어버리면 서로 섞이지 않는다. 계란과 버터가 잘 섞이지 않아 분리된 반죽으로 구운 파운드는 당연하게도 잘 된 반죽으로 구운 파운드보다 맛이 없다. 먹었을 때 퍼석하고 퍽퍽하다. 물과 기름이 섞이게 돕는 유화제를 따로 넣기도 하지만, 사실 계란 노른자도 유화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른자에 든 레시틴은 지질(lipid) 중에서도 인지질로, 물과 친한 친수성 부분과 기름과 친한 소수성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흰자보단 노른자를 먼저, 조금씩 천천히 넣어가며 충분히 섞어줘야 한다. 서두르지 말되 멈추지 않고.


 대학생 때의 좌우명은 ‘Carpe diem’이었다. 현재를 즐겨라. 과잠 소매처럼 이니셜이나 문구를 써넣을 일이 있을 때마다 새겨 넣었다. 그러나 삶이 좌우명처럼 살아지는 건 아니었다. 가훈이 가화만사성인 가정이 모두 비슷한 모습의 행복한 가정은 아닐 테니. 성격상 현재를 즐기며 오늘을 충실히 살 만큼 마음가짐이 여유롭지는 못해서, 육신은 현재에 존재하면서도 정신은 항상 과거나 미래에 존재했다. 후회하고 걱정하며. 지금은 좌우명이랄 게 딱히 없지만 4-50대가 되었을 때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문장은 있다. Amor fati. 지금은 아니지만, 10년 후의 내가 니체의 철학에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삶을, 운명을 사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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