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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Mar 29. 2023

노오븐부터 예스오븐까지

베이킹 비긴즈 : 프라이팬에서 빌트인오븐으로

 나이를 먹는 건 대체로 슬프지만, 좋은 점이 있다면 뭔가를 할 때 부모님의 동의를 하나하나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대신 사고를 치면 여전히 등짝을 맞을지도 모르지만, ‘냅둬~ 재도 성인인데 다 생각이 있겠지.’라며 생각이 있건 없건 약간은 참작의 여지도 생긴다. 오븐을 이용한 베이킹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에는 엄마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빵을 오븐에 넣고 뺄 때는 긴장된다. 물이 끓는 온도는 100도. 익숙한 온도라 크게 겁나진 않는다. 별의 표면 온도는 3,000도~30,000도. 이 수치는 상상의 범위를 벗어나 현실감이 없어서 온도보다는 그냥 큰 숫자 같다. 빵을 굽는 온도는 160~240도. 상상할 수 있는 범위의 고온이다. 예측 가능한 위험은 무섭다.


 어릴 때는 오븐을 쓰지 않는 노오븐베이킹을 했다. 아마 지금도 오븐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지식인에 물어가며 베이킹에 입문하는 방식일 것이다. 오븐을 쓰다 다칠까 봐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혹은 본인이 겁이 나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당시 우리 집에는 오븐이 없었다. 20년 전에 살던 5층짜리 조그만 아파트에 존재하지 않았던 오븐 대신 나는 프라이팬을 사용했다. 가장 많이 해 먹었던 건 핫케이크. 팬케이크(pancake)와 핫케이크(hot cake) 둘 다 같은 말이지만 왠지 팬케이크는 외국에서 사용하는 말 같고, 핫케이크는 제품명 때문에 콩글리시 같기도 하고 더 친숙한 느낌이 든다. 핫케이크는 바닐라 향이 나는 가루에 우유와 계란을 넣고 휘휘 저어서 걸쭉한 반죽을 만들고 부치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빵이다. 엄마가 핫케이크 가루로 만든 반죽을 프라이팬에 한 국자를 부으면 연노란색 반죽이 익어갈수록 점점 기포가 올라오는 데 마치 달 표면의 분화구 같았다. 핫케이크 뒤집는 건 내가 하겠다고 나섰는데, 손목 스냅을 이용해 프라이팬에서 반죽을 휙 하고 뒤집기에는 경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냥 뒤집개로 조심조심 뒤집었다. 맛있는 연갈색으로 익은 핫케이크를 접시에 옮겨 담고 메이플 시럽을 가득 뿌리면 완성! 왜 메이플 시럽은 잔뜩 뿌려도 금방 사라지는지는 건지. 수플레 팬케이크처럼 고급스러운 빵이 나와도 가끔은 내가 너무 잘 아는, 익숙한 불량한 맛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렇게 추억과 그리움으로 배를 채워야 할 때마다 핫케이크가 생각난다.


 그러나 나의 창작욕구는 이걸로 충족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외에도 프라이팬에 알루미늄 포일을 깔고 쿠키를 굽는 등 참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븐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빵을 굽는 데 사용했던 오븐은 빌트인 가스오븐이었다. 오븐을 켜면 바닥에서 파란색 가스불이 타오르는 게 보였다. 슬프게도, 베이킹에 적합한 오븐은 아니었다. 밑에서 불이 나오는 오븐은 프라이팬으로 빵을 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떡이나 핫케이크처럼 뒤집어가며 앞뒤를 지져서 익히는 빵이면 몰라도 이런 오븐에서 구운 빵은 바닥은 탔는데 윗면은 색은 나지 않아 허여멀건 했다. 노릇노릇한 구움색이 나지 않은 빵은 먹어보면 맛은 있더라도 딱 보기에 별로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취업을 하고 집을 나와 혼자 살게 되면서 아빠가 회사 창립기념일 선물로 받았다는 광파오븐을 내 살림살이에 끼워 넣었다. 혼자 사는 데 오븐이 필요할까 싶겠지만, 나는 대학생 때 자취하면서도 삼시 세끼를 꼬박 만들어 먹고 심지어 친구들에게 밥까지 해 먹이는 사람이었다. 조그만 광파오븐으로 나는 고등어도 굽고, 고기도 굽고, 빵도 굽기 시작했다. 윗불만 있는 광파오븐은 밑불만 있는 가스오븐보다 훨씬 나았다. 바닥이 조금 덜 익을 때도 있었지만 일단 구움색이 잘 났다. 살짝 색이 덜 난 바닥은 나중에 급한 대로 프라이팬에 지져도 괜찮았으니까. 광파오븐으로 나는 호두파이부터 마카롱까지 다양하게 구워 먹었다.


광파오븐으로 구운 호두파이


 부모님 댁에 들어와 살고 있는 지금 아파트에는 빌트인 광파오븐이 있다. 이제껏 사용한 오븐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 하지만 역시 밑불이 없어서 윗색이 많이 났어도 바닥이 만족스럽게 익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도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오븐을 예열할 때 오븐팬을 같이 넣어서 달군 다음 테플론 시트에 올린 반죽을 달군 팬 위에 올려서 굽는 식으로 아랫불이 필요한 빵도 어찌어찌 만들어내고 있다. 오븐을 새로 사려면 아마도 집을 먼저 사야겠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이 과연 언제 실현될지 미지수니 일단은 지금 있는 빌트인오븐으로 만족한다. 언젠가 200만 원이 넘는 비싸고 좋은 오븐이 아니더라도 한 번에 두 판씩은 구울 수 있는 오븐을 갖고 싶다. 작은 오븐으로 여러 판을 굽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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