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해원 Mar 31. 2023

형을 다질 수는 없잖아

화나는 날에는 제빵을

 SBS 예능 런닝맨에서 유재석이 요리를 하고 있던 김종국에게 왜 마늘을 다지고 있냐고 투덜거리자 김종국이 ‘형을 다질 수는 없잖아’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목소리는 차분한데 내용은 살벌한, 실제로 마음먹으면 가능할 것도 같은 농담과 진담이 섞인 그 말이 참 웃겼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이처럼 다지고 싶지만 다질 수 없는 사람이 참 많다. 그렇다고 일을 때려치울 수도 없고 사람을 칠 수도 없으니 대신 집에 와서 반죽을 친다. 이런 날에는 제과보다는 제빵이 제격이다.


 친구가 제과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나를 제빵왕이라고 부르며 비행기를 태웠다. 내가 딴 건 제빵기능사가 아니라 제과기능사니까 ‘제빵왕’보다는 ‘제과왕’이라고 해야 하고, 자격증을 땄다 해도 사실 왕보다는 무수리에 가깝다. 운전면허와 비슷하다. 잘해서 면허를 받은 게 아니라 이제 무면허로 잡혀가지는 않을 정도라고 할까.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국가기술자격증 중 제과제빵 관련 자격은 총 여섯 가지다. 기능사(떡제조, 제과, 제빵), 산업기사(제과, 제빵), 그리고 기능장(제과). 이 중 떡제조를 제외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제과와 제빵. 제과는 과자류를, 제빵은 빵류를 만든다. 그렇다면 과자류와 빵류는 뭐가 다를까?


 엄밀히 말하면 식빵은 빵이고 케이크는 빵이 아니라 과자다. 시폰케이크, 파운드케이크, 롤케이크 모두 제빵기능사가 아닌 제과기능사 시험 품목이다. '과자'하면 질소 포장된 봉지에 든 바삭한 감자칩이나 비스킷이 생각나는데, 부드러운 케이크는 왜 과자일까? 과자와 빵을 제일 쉽게 구분하는 기준은 발효의 여부다. 빵은 이스트(효모)를 넣고 발효시켜 만든다. 이스트는 당류를 분해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를 만들어 내는데, 이때 생긴 이산화탄소는 빵을 부풀게 하고 알코올은 빵의 맛과 향을 만든다. 식빵이나 바게트, 크루아상, 소금빵 등은 이런 발효 과정을 거쳐 만든 빵이다. 반면 제과는 발효 과정이 없다. 대신 베이킹파우더 같은 팽창제를 사용하거나 계란이나 버터를 휘핑해 공기를 포집하기 때문에, 오븐에 들어가면 과자류 역시 부푼다. 쿠키와 케이크, 타르트, 슈, 마카롱 등이 발효과정 없이 만드는 과자류다.


 그렇다면 도넛은? 도넛은 빵류도, 과자류도 있다. 우리가 먹는 도넛은 사실 다 같은 도넛이 아니다. 이스트 도넛과 케이크 도넛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제 명칭만 봐도 어떤 게 제빵이고 어떤 게 제과로 만들어지는지 감이 올 것이다. 프랜차이즈 도넛을 떠올려보자. 하얀 슈거파우더를 묻히고 잼을 넣은, 연노란색 카스텔라처럼 부드럽게 부서지는 도넛이 과자류인 케이크 도넛이다. 글레이즈를 묻히거나 크림을 듬뿍 넣은, 한 입 베어 물면 속이 식빵처럼 하얗고 폭신한 도넛이 발효해서 만든 빵류인 이스트 도넛이다.


 하지만 빵인들 어떠하리 과자인들 어떠하리 그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니 편의상 빵류와 과자류 모두 빵이라 부르겠다. 제빵을 할 때 반죽기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는 나 같은 홈베이커는 손반죽을 해야 한다. 빵을 만들려면 먼저 밀가루가 필요하다. 그런데 마트에 가면 여러 종류의 밀가루를 판다.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 이건 글루텐 함량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강력분은 글루텐 함량이 많고 박력분은 적다. 밀가루에 들어있는 단백질 글루테닌과 글리아딘은 물을 넣고 힘을 가하면 서로 결합하여 빵의 구조를 만드는 글루텐이 된다. 글루텐이 적은 빵은 찰기가 없어 부드럽거나 바삭한 식감이고, 글루텐이 많은 빵은 쫄깃하고 탄력 있는 식감이다. 제빵에는 주로 강력분을 쓴다. 그러니 다지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며 반죽을 치고, 던지고, 주먹질하며 힘을 가하면 구조가 탄탄한, 쫄깃하고 탄력있는 빵이 된다.

처음으로 만들어 본 크랜베리 베이글


 빵을 오븐에서 꺼낼 때도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다 구워진 빵은 오븐에서 꺼내자마자 틀 채로 작업대에 쾅 내리쳐야 한다. 이 과정을 ‘쇼크를 준다’고 하는데, 물론 ‘빵이 왜 이렇게 구워졌어!’하고 화가 나서 패대기치는 건 아니다. 오븐에서 구워지는 동안 반죽에 들어있는 액체 재료들 때문에 빵 내부에는 수증기가 생긴다. 이 수증기는 오븐에서 꺼내 빵을 식히는 동안 빵의 껍질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데, 이때 껍질이 수증기에 젖어 축축해진다. 분무기로 물을 뿌린 종이처럼, 젖은 껍질은 모양을 유지할 힘이 없어 결국 빵 전체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주저앉아 버린다. 이러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오븐에서 꺼내자마자 틀 채로 작업대에 내리쳐 빵에 충격을 주면 수증기가 껍질을 축축하게 하기 전에 조금 더 빨리 내보낼 수 있다. 그러면 빵은 식는 동안 덜 주저앉고 모양을 유지하게 된다. 필요해서 하는 과정이지만 쾅 내려칠 때면 은근히 속이 시원하다. 완성된 빵을 보면서 뿌듯함도 느껴지고. 이렇듯 베이킹은 나름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화도 풀고, 맛있는 것도 먹고.


 나는 내가 성취감을 자주 느껴야 하고 생각보다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 그런데 회사 생활이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능력과 상관없이 정해진 월급을 받고, 일을 잘하면 돈이 아니라 일을 더 받는다. 인류애와 인간성이 바닥을 치고, 떨어진 주식처럼 오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화도 많고 생각도 많다 보니 쉴 때마다 번뇌에 가득 찬 머릿속을 고요히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다니게 되는데, 내가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하는 취미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몸을 움직이게 하고, 성취감을 준다는 것. 베이킹은 유튜브로 보면 그저 예쁜 취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필요한 취미다. 재료 준비부터 계량, 공정을 거쳐 빵을 완성하는 게 끝이 아니라, 조리 도구들을 설거지하고 식힌 빵을 포장하려면 최소 서너 시간은 걸린다. 결과물이 예쁘다고 과정까지 전부 아름답지는 않다. 가족들이 퇴근하고 베이킹을 하는 나에게 오늘 야근하냐고 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몸을 움직여 빵을 만들면 어지럽던 머릿속이 정리된다. 화가 나면 단 게 필요하다는 말은 옳다. 나는 그걸 직접 만들 뿐이다.

이전 02화 노오븐부터 예스오븐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