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울고 웃던 날이 끝났다. 마지막 모습이 다른 여자랑 키스하는 거라니, 박은 자신을 비웃었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내 꼴이.” 박은 하늘이 껌껌해지도록 불을 켜지 않았다. 방은 어둠에 몸을 감췄다. 박은 한이 보고 싶었다. 사진첩을 열어보니, 한과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설마.” 박은 당황했다. 그동안의 연애에 한은 자주 사진 찍기를 원했다. 박은 사진 찍는 걸 싫어했지만, 한이 원하니까 들어줬다. “왜.” 한 장뿐이었다. 박과 한의 졸업식 날, 고교 동창들이 붙으라며 아우성치곤 찍어준 사진이었다. 박은 한과 오랜 시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박은 “언제부터 사귄 거였냐, 우린.“
‘그래서, 어쩔 건데.’ 한은 박과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려 눈을 감았다. 발소리가 들렸다. 박일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닐까 봐.” 한은 울기 시작했다. “너는 사랑이 아닐까 봐.“ 한은 뒤이어 박이 다른 여자랑 키스한 모습을 떠올렸다. “나만 몰랐어, 나만.” 한은 박과 찍은 사진을 지우려고 했다. 사진첩을 열어보니 온통 반쪼가리 박의 사진뿐이었다. 흔들리거나 얼굴이 잘렸거나 해서 같이 찍은 사진도 온전치 않았다. 한은 속상했다. 자신이 이런 연애를 했다는 것이 너무 서러웠다. 박은 늘 그런 식이었다. 자신이 세상 잘났다는 듯이, 고개를 추켜올리고 모든 걸 내려봤다. 박에게 있어 한도 그 대상의 일부 중 어느 비중 없는 역할 하나쯤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박은 책상 아래에 머리를 처박고 뭔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박은 기침을 했다. 신발 상자를 들고 일어섰다. 먼지가 날렸다. ”아.“ 박의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 박의 눈에서 눈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물을 밖으로 내보냈다. 눈물 한 방울이 똑, 상자에 올해 처음 자국이 생겼다. ”눈물 자국이냐, 하필.“ 한이 달마다 써준 편지가 있었다. 6개니까, ”반년 만났네, 우리.“ 박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놀랐다. 6년은 만난 줄 알았는데, 방금 흘린 눈물이 아까워졌다. 몸은 반대였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편지마다 붙여진 한이 그린 스티커가 자꾸만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흐려진 시야에 한의 스티커가 인상을 찌푸리는 듯도 했다. 한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망설이는 자신을 보며 비웃다가 말고, 바닥에 누웠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한은 사진을 지우다 울고, 울다 지우고, 지우다 울고를 반복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 박이었다. 한은 그 사이, 박의 번호를 지웠으나 자신의 기억에 자리 잡은 박의 공간은 미처 치우질 못했다. ”응.“ 한은 박처럼 굴려고 애썼다. 박은 한의 목소리에 잔뜩 울음이 가득한 걸 느꼈다. 자신에게 화가 나, 한에게 말했다. ”어디야.“ 박은 기껏 전화해서 하는 말이 이런 것뿐인 게 미안했다. 다시 말하려는데, 한이 말했다. ”집이야.“ 보통 한은 박에게 묻고, 박이 대답하면 말꼬리를 잡아다 박에게 선물하곤 했다. 예쁜 말로. 이번에는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박은 이런 상황이 어색해서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은 생각보다 겁쟁이였고, 한은 생각보다 용감했다. “끊을게.” 박은 조바심이 났다. 한이 먼저 끊으면, 정말 끝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박은 사귀는 동안 한 번도 내뱉은 적 없었던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그.” 한은 박의 태도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도하면서도 불안했다. “그냥, 내가 널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 “뭐? 그래서, 어쩌자고.“ 한은 박이 내뱉은 말을 도로 돌려줬다. 조금은 한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