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987년 1부 봄 16화 권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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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오석아!”
정우 목소리다. 언제나 그렇듯 유쾌하고 리드미컬하여 때로는 오페라 레시타티브 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런 소리다.
오석은 그 목소리에 이끌려 정신없이 읽고 있던 셰익스피어 ‘폭풍우’의 마법의 섬에서 선릉역 만남의 장소 팔각형 벤치로 급히 소환되었다.
국민학교때 부터 알고지낸 그야말로 죽마고우였지만 어찌 어찌 하다 보니 대학 입학하고 두달이 후딱 지난 다음에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둘 사이의 각별한 관계를 생각하면 두 달은 엄청나게 긴 공백이다.
아버지끼리 동향 친구에, 고등학교 동창에, 대학 동창에, 심지어 직장 동료다. 본인들 끼리는 국민학교 4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대학도 같이 들어왔다. 이쯤 되면 친구 보다는 거의 형제에 가깝다. 아마 미국이었다면 거침없이 서로 “헤이, 브로” 이렇게 부르는 사이일 것이다.
오석이 읽던 책을 덮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나와 줘서. 바쁠텐데.”
정우가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까딱하며 대답했다.
“바쁘긴 뭘. 연주회 일정은 6월부터야. 아직 한 달 남았어.”
“그러니까 준비해야지.”
“준비는 무슨. 다 평소 실력이지.”
정우가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씨익 웃었다. 건방지지만 기분나쁘지 않고 오만하지만 밉지 않은 그런 웃음이다.
이게 정우의 매력이다. 정우는 분명 잘 생긴 녀석지만 미남이라고까지 할만한 외모는 아니다. 그러나 일단 눈을 마주치면 확 끌려들고 절대 미워하기 어려워진다. 거기에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아우라까지 보태지면 클래식 아이돌 디누가 완성 된다. 피아노 앞에 앉은 정우의 모습은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에 가까웠다.
웃던 정우가 오석이 방금 덮은 책을 확 잡아 챘다. 정우는 늘 말도 행동도 거침없었다.
“뭐 보고 있냐? 오우! 템페스트! 제법인 걸? 이거 나도 좋아해. 환상적이고, 꿈이 있고 그러면서도 가르침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는! 이거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오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찍어 둔 작품이야.”
“그럼 내가 노래 붙이기 편하게 각색해 줄게.”
“오, 그럼 대환영이지. 하하하! 리브레토 하나 벌었다. 참, 기왕이면 독일어로도 부탁해.”
“좋아.”
“아무래도 한국어로 오페라 만드는건 아직 벅차서. 왜 그러냐 하면.”
오석은 마음을 가다듬고 각오를 다졌다. 이때부터 정우의 이야기, 아니 강의가 시작될 참이기 때문이다.
정우는 말을 무척 많이 하는 캐릭터지만 정작 대화는 잘 하지 않았다. 그냥 음악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음악 이야기는 언제나 자신의 음악 철학, 음악 연구 성과 등을 소개하는 강연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정우는 원래 그랬다. 만나면 언제나 음악 이야기만 했다. 음악 이외에는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 모든 것을 음악으로 바꿔버리겠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면서 언제나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그것을 내가 하겠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음악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 음악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아니나다를까 오석은 이탈리아어가 아닌 언어로 오페라를 만들 때의 어려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에 대한 정우의 강연을 골이 아플때까지 들어야 했고, 비이탈리아어 오페라, 특히 한국어 오페라라는 완전한 경지를 열어 젖히는 위대한 천재 디누가 펼치게 될 찬란한 미래에 대해 들어야 했다.
“참, 그런데 오석아. 너 본론 아직 얘기 안 했다. 왜 보자고 했어?”
정우는 오페라 강의를 한 바탕 마친 다음에야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본론? 네가 언제 말할 틈이나 줬어?”
“그랬나? 그래. 내가 너무 말이 많았네.”
“그래 임마. 사실 나 여자친구 생겼어.”
“뭐? 여자친구? 네가? 모범생 권오석이? 여학생 하고 이야기 나누기만 하면 그냥 날라리 되는 줄 알고 있던 네가 여자친구? 너 생각 안나? 고등학교 때 억지로 미팅에 끌고 나갔더니 두 시간 동안 말 한마디도 못하고 밀크 세이크만 쪽쪽 빨다가 그냥 갔잤아?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 가지고?”
오석은 별 쓸데없는 것 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정우의 기억력이 야속했다.
“지금 놀리는 거야?”
“아니, 아니. 놀리는 건 아니야. 하지만 놀라는 건 맞아.”
“지금 그거 언어유희라고 한거야? 오페라 연구 한 번 잘 했네. 어쨌든 걔가 너 만날 수 있냐고 자꾸 물어봐서, 그래서 같이 한 번 만났으면 해. 넌 유명 인사잖아?”
“유명은 무슨. 외국에서 공연 몇 번 한 것 가지고.”
“그래도 음반이 얼마나 많이 팔리는데?”
“오냐. 오냐. 그래 그렇게라도 말해주니 고맙다. 그런데 너는 샀냐?”
“테입으로 샀어.”
“시디로 사야지. 그래야 내 몫으로 떨어지는 돈이 더 많지? 쪼잔하게 테잎이 뭐냐?”
“우리 집에 시디 플레이어 없어.”
“그럼 LP로 사.”
“알았어. 하여간 돈 밝히긴. 다음 판 부터는 LP로 살게.”
“그런데 네 여자친구 말이야. 언제 볼까?”
“지금! 곧 올 때 되었어. 어, 저기 나온다. 수현아! 여기야.”
오석이 막 계단을 올라와 개찰구로 향하는 수현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수현도 금세 오석을 발견하고 같이 손을 흔들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온 수현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정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마치 무대에서 청중을 향해 인사하는 것 같은 포즈로 허리를 숙였다.
“오석이 동창 권정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디누라고도 부릅니다.”
“바로 보고 알아봤어요. 어머! 정말이야. 어쩜 좋아. 영광이에요. 오석이 친구 오수현이에요.”
“영광은 전라남도에 있고요. 우린 그냥 같은 스무 살 내기들이죠.”
그러자 수현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오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현이 저렇게 크게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우는 그 어려운 것을 저렇게 쉽게 해치웠다. 그것도 하나도 안 웃긴 그야말로 아저씨들이나 할 것 같은 말로.
“웃는 모습 보니 오석이가 부러운걸요? 이 모습을 날마다 볼 수 있다니?”
“집어 치워. 느끼한 새끼.”
오석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정우가 너무 쉽게 수현이와 가까워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오석의 머리 속에 정우가 강남구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니 거의 여신으로 통했던 최나경을 얼마나 손쉽게 사귀었는지 떠올랐다. 사실 오석은 최나경을 짝사랑했었다. 아니 최나경을 짝사랑한 남학생이 어디 한 둘이었을까? 다들 속 앓이만 하고 감히 말도 쉽게 붙이지 못했던 최나경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단 한 번 사귀자고 말했고, 그걸로 상황 종료되었다.
그런데 정우 녀석은 사귄 여자가 최나경 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로 국제적으로 놀았다. 디누 이전에 이미 클래식 아이돌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바이올린 요정 아녜스와 1년간 대놓고 커플짓을 하고 다녔다. 21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것이라는 평을 받고 심지어 바이올린 여신 소리를 듣기도 하는 신동 지네트를 상대로도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한 마디로 정우는 지표면 곳곳에 페로몬을 뿌리고 다니는 놈이다. 그 페로몬은 여자는 물론 남자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강하다. 그러니 기분 나쁘고 불안할 수 밖에.
이렇게 한 번 만나고 난 바로 다음날 수현이 “미안해. 나 오늘부터 디누랑 사귀기로 했어. 우리 그만 헤어지자.” 이렇게 말하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전혀 신기할 것이 없는 녀석이 정우다. 달리 아이돌이겠는가?
“야, 권오석.”
정우가 한 동안 말 없이 자기 내면과 싸우고 있는 오석의 어깨를 탁 두드렸다. 오석은 이 부정적 감정과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뭘?”
“이 칙칙한 전철역에 계속 이렇게 있는 거냐? 어디 좀 들어가자. 그리고 오늘 네가 쏘는 거지? 나 돈 한 푼도 안 가지고 나왔다. 알아서 해라.”
“돈 많이 버는 새끼가 치사하게. 알았어. 내가 낼게. 수현아. 가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오석은 처음부터 자기가 낼 생각이었다. 이미 봐두었던 레스토랑도 있었다. 선정릉 입구에 있는 커다란 유리창을 가진 곳으로 이른바 왕릉 뷰가 가능한 곳이다.
“오, 이런 데가 있었어?”
정우도 꽤 놀란 듯 실내와 뷰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수현도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자 이리 앉아.”
오석이 미리 봐두었던 전망이 좋은 자리로 그들을 이끌었다. 정우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열어 보더니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와, 여기 생각보다 훨씬 센걸? 오석아. 너 무리하는 것 아니야?”
“걱정 마. 나 돈 많아.”
오석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치켜 올렸다.
“야, 야, 너 용돈 얼만데?”
수현이 메뉴판을 한 번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석의 귀에 대고 살짝 속삭였다. 오석이 태연하게 대답한다.
“아버지가 주는 용돈은 10만원인데 외할머니, 외삼촌이 또 챙겨주는 게 있어서 20만 원 정도 돼.”
“딱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 만큼이 용돈이네.”
오석은 수현의 이 말이 웬지 마음에 걸렸다. 살짝 비난의 톤이 느껴진 것이다.
물론 오석은 한 달에 20만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지하철을 한달 내내 탈 수 있는 월 정기권이 6,000원. 매일 학생 식당에서 점심 사 먹으면 12,000원이니 말이다. 심지어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50만원, 사범대학은 27만원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정우가 팔짱을 끼고 눈을 부라렸다.
“20만원 그럼 시디가 30장이잖아? 그런데 시디도 엘피도 아닌 테이프를 샀단 말이지?”
“야, 넌 뭐든지 그렇게 음악으로 끌고 가냐?”
“그럼, 내가 그것 말고 할 말이 뭐가 있겠냐? 안 그래요, 수현씨?”
“아이. 수현씨가 뭐예요?”
“맞아. 이상하네. 안 그러니 수현아?”
그러자 수현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대답 못해.”
“왜?”
“일반적인 사람은 음악만으로 살 수 없어. 하지만 디누한테 음악이 주는 의미는 일반론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니까 정답은 너만 알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걸 남한테 묻니?”
그 말에 정우가 박수를 쳤다.
“분더바! 오석아. 너 큰일 났다. 네 여자 친구가 너 보다 머리가 훨씬 좋아. 너 아무래도 꼼짝없이 잡히겠어.”
“응? 그래?”
대충 대답했지만 오석은 시무룩했다. 오석은 수현과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기까지 꽤 여러날 걸렸다. 하지만 정우는 만나자 마자 너무 쉽게 이야기 꽃을 피우고 농담까지 주고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