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장편소설 별이 잠드는 바다 16화
미안해 너무 미안해 1
“머피의 법칙이네요.”
예진이가 카페 통유리를 통해 마니산을 보며 말했다. 마니산 전경이 창틀을 프레임 삼아 마치 액자에 걸린 풍경 사진처럼 보였다.
“뭐가 머피의 법칙인데?”
“실크 입으면 파스타 먹을 일이 생긴다?”
예진이가 명란 크림 파스타를 조심스럽게 말아 올렸다.
“내 브런치랑 바꿔줄까?”
“그건 데리 소스 범벅이잖아요? 그냥 이거 먹을래요. 어떡 하다 보니 상담이 아니라 제 자서전 쓰려고 대필 작가님 모신 것 같이 되었네요? 그것도 힐링의 한 방법이니까. 달려 볼게요. 2012년은 그냥 휙 지나 갑니다.”
“아니, 왜?”
“계속 여기 저기 불려 다니고, 가는 데 마다 노래 세 곡 부르고 이야기하는 20분 짜리 무대 서고, 예능 방송 불려 다니고 팬 싸인회 두 번 하고, 5대 광역시 돌며 팬 미팅 하고, 서울에서 마무리로 팬 미팅 하고 그러다 보니 1년이 후딱 갔어요. 그 사이 사이에 광고 촬영 하고.”
“정신 없네?”
“그렇긴 한데, 일정이 아주 빡빡하진 않았어요. 이주란 이사가 음향, 조명 제대로 안 갖춰진 곳, 저희 고급 이미지에 맞지 않는 곳은 다 스킵 했거든요.
꽤 민주적인 면이 있었어요. 일정 받으면 바로 확정 안해요. 다엘 언니가 멤버들 학교 일정, 컨디션 같은 것 체크해서 컨펌, 연기, 취소 요망 등등 재분류 하고, 그거 검토해서 이주란 이사가 확정하면 멤버들에게 알림이 오죠. 캘린더에 저장되고.
행사나 방송 큐시트 짤 때도 다엘 언니가 ‘하린이 목 상태 안 좋으니까 오늘은 가이드 좀 올려요. 소이가 대신 고음 칠 거니까 소이 마이크 리버브 내리고 라이브 감 살려줘요.’ 이런 식으로 조율 했어요.”
“리더 본인이 아프거나 컨디션 나쁘면?”
“그런 적이 없어서 생각 못해봤네요. 그땐 언니가 금강불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꾹 참고 버텼나봐요.
다엘 언니가 꼼꼼하게 스케쥴 관리 잘 해서 21일 집중 활동, 7일 컨디션 조정 패턴도 꾸준히 지켰고, 방송 있는 날 아니면 고등학생 멤버들 오전 수업도 대부분 챙겼어요. 그런데 학교 가기 정말 싫었어요.”
“와. 김예진이 학교가기 싫다는 말도 다 하네.”
“그 스케줄로 한번 뛰어 보세요. 꼼짝도 하기 싫은데 학교 가라니? 결석 한다고 하면 매니저까지 갈 것도 없이 언니한테 혼났고요.”
“그 오전 수업 말이다.”
“제대로 받았냐? 제 성격 아시잖아요? 출석 했으면 당연히 열심히 하죠. 저 수행평가도 어떻게든 다 제출했어요. 매니저 심부름을 시켜서 내더라도. 다른 애들도 사전 교육 충분히 잘 되어서 저를 평범한 학생 처럼 대해주려 애썼어요. 중간고사, 기말고사, 당연히 정상적으로 다 치렀고요. 수학여행, 그건 영영 못 가고 말았죠.
중간에 일본 가서 버스킹 하고 팬 싸인회 했어요. 일본시장 간 보기 들어간 거죠. 외국 처음 가 본 거에요. 그런데 처음 타는 국제선이 프레스티지 석이라니. 이주란 이사는 본인은 직원들과 일반석 타고 저희 멤버들과 스타일리스트만 프레스티지 태웠어요.”
“처음 타는 국제선 어땠어?”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어요. 벨트 사인 꺼지자 마자 스타일리스트 언니가 패치 붙였다 뗏다, 뿌리고 비비고 난리를 쳤거든요. ‘이러려고 우리 넓은 프레스티지 석에 태운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을에는 외부 활동 줄이고 새 앨범 준비하고. 세이 언니, 하린 언니 수능 준비했죠. 대신 제가 바빴죠. 이런 저런 예능 혼자 대응하느라.
“수능 준비까지 챙겼다고?”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엔터사에서 아이돌 수능을 다 챙겼다니.
“마케팅이죠. 유노이아는 모범생, 우등생 컨셉의 청순돌이니까. 그걸로 실컷 마켓팅 해 놓고 고3 멤버들 입결이 시원치 않으면 사기 당한 기분 아니겠어요?”
“음,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이돌 그룹 활동 하면서 입시가 되냐고?”
“안 되면 되게 하라. 바로 K 아이돌 아니겠습니까? 세이 언니, 하린 언니는 원래 공부도 잘했죠. 작곡 유닛이라 음악 베이스 탄탄하고요. 실용음악 하는 대학 중에, 팬심이 납득 가능한 수준까진 가야 했어요. 다엘 언니 다니던 성신여대가 기준점. 팬들이 ‘활동하면서 공부하기 어려운 거 아는데, 그래도 우리 자존심은 맞춰줘.’ 하는 딱 그 선.”
“세이랑 하린, 경희대 갔지? 실용음악과?”
“와, 어떻게 아셨어요?”
“나, 유노이아 뉴스 나오는 족족 다 봤거든.”
“감동이야. 그럼 혹시....”
예진이가 말끝을 흐렸지만, 그 표정만 봐도 무엇을 걱정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떤 사진이 기사로 뽑히는지, 그리고 어떤 제목이 독자를 낚는지. 인터넷 상의 연예 뉴스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건 안 봤어. 제목 불쾌한 건 그냥 넘겨.”
“감동이 두 배!”
예진이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경희대. 포스트모던 음악학과, 줄여서 포모과라 불러요. 가수 세계에선 여기가 서울대에요. 두 언니야 걸어 다니는 포트폴리오지만, 입시는 또 입시잖아요. 두 사람 포모과 들어갔을 때 팬심 폭발했죠. ‘봐라, 우리 애들 엘리트돌이라고 했잖아?’ 분위기. 회사도 난리 났어요. ‘대학 새내기 세이와 하린을 응원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스페셜 굿즈 내고, 캠퍼스 버전 포토카드, 입학 기념 키링. 굿즈 장사로 완전 굿판 벌였죠.”
“악착같이 뽑아먹네.”
“자본주의잖아요? 입학식 날 하린 언니, 꽃다발 들고 캠퍼스 걷는 사진 하나로 ‘경희대 여신’ 등극했고요. 두 언니가 ‘선배님들, 신고식 합니다!’라는 주제로 교내 버스킹 했어요. 그건,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요. 나중엔 경찰 기동대까지 투입됐으니까. 그 일로 두 언니는 물론이고, 멤버 전체가 이주란 이사님한테 불려가서 단체로 엄청 혼났죠. 숙소 돌아와서는 또 다엘 언니한테 줄줄이 깨졌고요. 세이 언니 우는 거, 그때 처음 봤어요.
‘그냥 지나가는 선배님들한테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사람들 몰려올 줄 몰랐어요. 저도 무서웠어요. 멈추지도 계속하지도 못하고’
이러면서 막 울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전 좋았어요. 아, 이거 좀 새디스트인가요? 아무리 두 언니가 30분 만에 곡 하나 뚝딱 만드는 능력자라도 결국엔 저처럼, 그냥 애였던 거예요. 무대에서 아무리 반짝여도, 결국 같이 혼나고 같이 울던, 그냥 열 아홉 살짜리 애들.”
나는 살짝 이해가 안되었다. 아무리 탑스타라도 대학 새내기고, 그래서 제일 잘하는 노래와 춤으로 신입생 신고합니다 하고 버스킹 좀 하는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란 말인가? 그래서 한 마디 던졌다.
“그게 그렇게 단체로 불려가 혼 날 일이야?”
“타임라인 들려 드릴게요. 두 언니가 교내 광장에 주섬주섬 장비를 세워요. 벌써 학생들 모여 들고 사진 찍기 시작해요. 바로 트위터, 페이스북 올라가죠. ‘대박, 경희대에서 유노이아 세이, 하린이 뭐 하려는듯.’ 그럼 막 댓글이 난리가 나죠. ‘좌표 부탁드립니다.’ 등등.
경희대, 외대, 시립대 학생들 몰려와요. 팬덤 카페까지 흘러 들어가면 응원봉 들고 몰려와요. 버스킹 시작할 때는 이미 야외 콘서트 급이죠. 안전 요원 없죠? 보디 가드 없죠?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막 밀려들죠?
자 이제 인사하고 노래 시작합니다. 그 시점이면 기자들, 유튜버들까지 들어왔을 거에요. 그렇게 적어도 1,000명, 많으면 5,000명이 몰려와서 엉키는 거죠. 수업? 안되죠. 학생은 커녕 젊은 교수님, 강사님들까지 뛰어 나왔을걸요? 학교측은 교직원 풀어서 외부인 출입 제한하고 경찰에 질서유지 공문 보냈겠죠? 그리고 소속사에 항의 전화 넣었겠죠? ‘아니 학교에 협조 요청 없이 멋대로 행사 하면 어떡합니까?’ 그럼 대표는 이주란 이사한테 난리를 쳤겠죠? ‘고가치 자산’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 되었는데 그거 모르고 있었냐고.”
“아, 그러네.”
“우리는 대학에 다닐수는 있지만 대학생으로 살수는 없었던 거에요. 그걸 먼저 대학생 된 두 언니가 상당히 위험하게 증명한 셈이죠.”
“참사 안나길 다행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우리가 다엘 언니한테 한참 깨지고, 시무룩해 있을 때였어요. 이주란 이사가 또 숙소에 왔어요. 너무 화를 내버려서, 마음이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저희 넷을 소파에 앉혀 놓고, 이번엔 정말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더군요.”
“넷이라고? 너희 리더는?”
“다엘 언니는 저희 앞에서는 절대 야단 안 맞아요.”
문득 나는 예진이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긴 작은 소동 하나를 떠올렸다.
갑자기 생활지도부 선생님들과 학교 보안관이 호루라기를 불며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따라갔더니, 운동장 가장자리에 늘어선 나무마다 남학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제인 구달 다큐멘터리 한 장면 같아 웃음이 나왔지만 생활지도부 선생님들에겐 절대 코믹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내려와!”
호통이 난무했고, 마침내 나무에서 끌려 내려온 20여 명의 남학생들이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고개 푹 숙이고 혼쭐이 났다.
그런데 예진이가 혼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예진아.”
“선생님.”
“무슨 일이야?”
“저 때문에 혼나는데, 말씀 드릴 타이밍이 안 나와요.”
“나한테 말해. 생활지도부장님께 잘 말씀 드릴게.”
예진이는 조심스럽게 대추나무 쪽을 가리켰다. 학교 2층 높이쯤 되는 큰 대추나무였고, 마침 가지마다 잘 익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저거 맛있겠다 한 마디 했어요. 누구한테 한 것도 아니고 그냥요. 그런데 옆에 있던 현성이가 ‘내가 따줄게’ 하더니 막 올라가고, 그러니까 다른 애들이 ‘나도’, ‘나도’ 이러면서 올라가고, 그러다 아무 나무나 막 올라가고. 어쩌죠? 제가 벌점 스무 명 거 다 받으면 안 될까요?”
예진이는 심각하게 말했지만,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그 말이 목까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쌤! 또 딴 생각 했죠?”
서른 살 예진이 목소리가 다시 나를 깨웠다.
“아, 미안. 잠깐 그 대추나무 소동이 생각나서.”
“헉. 그걸 기억하세요?”
“그걸 어떻게 잊어? 넌 그때도 아이돌이었어.”
“그걸 이제 아셨어요? 그 얘긴 그만 하고요. 그날 이주란 이사가 저희 네 사람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알았지? 이제 너희는 날개짓 하나가 태풍을 부를 수 있는 존재야. 진짜 아이돌 된 거야. 입학 신고식 좋아. 취지 좋고, 그림 좋고. 단, 내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해. 알겠지?’
‘네.’
‘그리고 늦었지만 서진이, 하린이 입학 축하해. 내년에 소윤이 예진이도 힘내자. 그리고 대학도 힘들겠지만, 형식적으로 다니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제대로 다녀야 해. 시간 부족하면 차라리 5년, 6년 넘어가더라도 꼭 제대로 졸업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이 있으니까.’
그때는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몰랐어요. 그냥 ‘어휴, 저 잔 소리.’ 이랬죠. 지금은 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회사는 입결만 신경 썼지 졸업은 관심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대학 졸업할 나이 되면 걸그룹 할 나이가 아니니까.
이주란 이사는 거기까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말이죠. 기왕이면 이렇게 말하면 좋았잖아요?
‘대졸과 고졸은 엄청 다르다. 대졸이면 아이돌 경험까지 살려서 다른 분야로 진출할 여지가 있는데 고졸이면 그냥 그걸로 끝이다. 평생 아이돌 할 거 아니잖아? 앞으로 3-4년이야. 대학 열심히 다녀.’
‘그래야 다음이 있어.’ 꼭 이렇게 말해야 했을까요?”
이쯤 되니 나는 이주란이라는 사람이 예진이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진이가 나한테 ‘쌤’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실제로 예진이의 스승은 이주란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긴 아이돌로 살아왔으니 그럴 수 밖에 없겠지. 그런데 예진이는 한번도 이주란을 ‘쌤’이라 부르지 않았고, 꼬박꼬박 ‘이사’라고 불렀다.
예진이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부터 광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내 일이고 광고는 ‘상품으로 팔리는 일’ 이란 생각 지웠어요. ‘다음’이란 말이 망치처럼 머리를 때렸어요.
계약 끝나는 해가 2017년이에요. 스물 둘? 남들 사회생활 시작도 하기 전에 은퇴? 이거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은 5년 최대한 벌어야 했어요. 그럼 광고 밖에 답이 없죠.
아디다스, 에뛰뜨 이런 데서 먼저 시작했죠. 아시겠지만 제가 립밤 퀸이거든요. 제 스타일이 화장품 광고하고 안 어울리는데 립밤은 찰떡이었어요. 에뛰뜨 같은 거 열 개 찍어도 소이가 불가리 퍼퓸 하나 찍으면 게임 셋이긴 했죠.
제 성격이 참, 그땐 그런 게 다 경쟁심이 생기더라고요. 돈을 모아야겠다고 마음 먹으니까 더. 한 팀인데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우리 다 어렸죠. 그땐. 이걸로 2012년은 끝. 그리고 2013년. 터졌죠. 완전히 터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