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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May 26. 2020

번호를 부르지 마세요

내 교직 경력 28년 동안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기는 것이 아이들을 “번호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아이들의 번호가 어색하다. 가령 누군가가 “그 반 21번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도대체 그게 누구를 말하는 건지 감을 잡지 못한다.


내가 아이들을 번호로 부르지 않았던 까닭은, 학교 다니던 시절 번호로 불리는것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이다. 도덕의 황금율 아닌가? 기소불욕물시어인. 번호로 불리는 것이 싫었던 까닭은 번호로 불리는 순간 한낱 추상으로 바뀌어 버리는 쪼그라드는  나의 존재감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감이 쪼그라 드는 것을 의식하는 정동. 이게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슬픔 아닌가? 번호로 불리는 순간 나는 슬펐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다.  


불편하긴 하다. 우리나라 학교는 아니 우리나라 사회가 온통 번호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아이들을 번호로 부르지 않다 보니, 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종종 곤란을 겪기도 한다.  가령 어느 교과 교사로부터 메신저가 날아오는데, "그반 3,7,13, 22번 학생이 과제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면 도대체 그게 누군지 도무지 알수없어 결국 명렬표를 보고 찾게 된다. 사실 그렇게 쪽지 보낸 교사도 그게 누군지 몰랐을 것이다. 그저 체크된 표를 보고 그대로 숫자를 옮겨 적었을 뿐. 그게 바로 숫자의 위력이다. 인격과 개성을 삭제하는. 그래서 교도소나 수용소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숫자를 부르는 것이다. 수학여행을 가거나 할때 버스 좌석 배치나 숙소 배치를 할때 일일히 이름을 적다 보니 훨씬 일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고, 때로 누굴 빼먹었더라 상황이 되면 꽤 오랜 시간 버퍼링을 해야 한다. 그래도 그 불편은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 


만약 포로들을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으면 과연 아우슈비츠 같은 끔찍한 범죄가 가능했을까? "100번-110번까지 오늘 최종 해결" 이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오늘은 칼, 하인츠, 유스투스, 그레고르를 처리함."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일단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인격을 부여하고, 서로 구별되는 이름을 통해 개성을 인정하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영장류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들도 두 패로 갈린다지 않는가? 철저히 사람/동물 2원론의 관점을  고수하는 학자들은 "피실험 1호, 2호"이런식으로 부르고, 동물을 인격으로 대하는 학자들은 이름을 붙인다.


그러니 학교에서건 어디서건 번호를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 조금만 신경쓰면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스타벅스에서 사람들이 굳이 닉네임을 설정하는 까닭도 에이23번 고객님 이렇게 불리는 것 보다는  프레드 고객님, 제시카 고객님 이렇게 불리는 편히 훨씬 기분 좋기 때문이다. 물론 직원은 제시카가 누군지 프레드가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13일'에는 독특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본능이 잘 나타나 있다. 어차피 총맞아 죽을 상황에서 구태여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색깔이고자 하는 사형수의 저 당당한 태도를 보라. 그는 그 순간 처형 번호 몇 번이 아니라 당당한 이름 카를로스, 라모스, 후안, 호세, 로드리고였을 것이다. 


학생 존중. 먼 곳에 길이 있지 않다. 번호만 집어 치우면 된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름을 부르고, 이름을 쓰자. 그리고 번호 따위는 아예 잊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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