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배의 억울한 죽음과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정몽주의 조사
공민왕이 등극할 무렵, 고려는 사실상 무너진 것이나 다름 없는 나라였다. 조선으로 치면 거의 철종 시대. 게다가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외침에 시달렸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외침은 왜구가 아니라 홍건적이었다. 백성들을 가장 잔혹하게 살상한 무리 역시 홍건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사람을 태워죽이고, 여성의 젖가슴을 잘라 구워 먹었다고 하니, 아무리 기록이 과장되었다 해도 그들의 흉포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홍건적은 '적'이라는 이름과 달리 도적이나 산적이 아니다. 원나라에 반기를 든 한족들의 일종의 광복군이다. 그러니까 몽골로부터 독립하려고 싸우는 중국인들이 수십만명이나 한반도로 쳐들어와 수많은 백성을 살상하고 개경까지 함락시킨 것이다.
당시 무장들은 개경을 사수하자고 주장했지만 공민왕은 멀리 복주(오늘날의 안동)가지 몽진할 것을 결정했다. 결국 3원수(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는 오늘날의 안성, 용인 라인에 머물러서 개경 탈환을 노리고, 왕은 죽령을 넘어 안동으로 피난을 가는, 이렇게 정규군과 왕이 수백킬로미터 떨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더구나 피난지에 세운 임시정부의 기강도 제대로 잡히지 않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때 대소신료들을 꾸짖어 기강을 세우고, 전국에서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그래도 한 판 해 볼 수 있게 만든 인물이 정세운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대신들은 물론 공민왕에게도 면박을 주며 군기를 잡았다. 왕은 발끈 했을수 있지만 어쨌든 그런 기백있는 지도자가 필요했기에 참았으리라. 하지만 내심 "어, 이거 최충헌 시즌2 나오는 거 아님?" 이런 걱정을 했을 것이다.
어쨋든 이렇게 박박 긁어모은 20만 병력을 거느리고 도총관이 된 정세운은 3원수(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거느리고 홍건적을 격파하고 개경을 탈환한다. 이때 베어 죽인 홍건적이 거의 10만이라 하니 엄청난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이없는 일이 일어난다. 3원수가 정세운을 죽이고, 다시 공민왕이 3원수를 죽인 것이다.
정세운의 전임 도총관이었던 김용이 질투에 눈이 멀어 '정세운이 모반하려 하니 즉시 참하라'는 가짜 어명을 안우에게 보내고,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를 설득 내지 협박하여 결국 정세운을 죽이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군부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3원수를 벌하기 어려워 먼저 사정 설명을 듣겠다며 안우를 부르는데, 안우는 막상 왕을 만나기도 전에 습격을 당해 죽고, 안우가 죽자 마자 이방실, 김득배를 역적으로 선포는 추포령이 내려 결국 이들도 모두 죽는다.
이로써 홍건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함락당한 개경을 되찾은 네명의 영웅은 승리하고 4일만에 모두 죽는다. 이 신속한 과정이 과연 질투에 눈 멀은 김용의 조작극일지 아니면, 전쟁에 승리하면서 영향력이 강해지는 군부를 제압하기 위한 공민왕의 술수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단 김용도 결국 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반역자로 처형당하고 말았으니. 공민왕은 짧은 기간 안에 무려 원나라 기황후의 친정인 기씨 집안을 도륙내어 버린 전적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 술수를 보면 3원수 제거과정 역시 수법이 비슷하다.
하지만 모두 그렇게 짐작만 할 뿐 쉬쉬하며 모른척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어이 없는 일이 아닌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들을 단 4일만에 변명 한 마디 안 들어보고 모조리 목을 베어버리다니 말이다. 안우, 이방실은 게임 식으로 말하면 무력 만렙을 찍은 무장들이고, 김득배는 정몽주, 문익점 등을 가르칠 정도로 문과 무에 모두 능한 인물이었다. 무너져 가는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나 다름 없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제 손을 베어버리고 말았으니.
백성들은 거리에 내어 걸린 김득배의 목을 보고 땅을 치며 통곡했지만 신하들은 자기들도 엮일까봐 두려워 모른척 하고 있었다. 이때 과감하게 김득배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게 해 줄 것을 요구한 용감한 선비가 있었다. 그가 바로 포은 정몽주다. 선생님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의외로 공민왕은 이를 선선히 허락했다. 아, 역시 찔리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정몽주는 역사에 길이남을 무시무시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제문을 지었다. 정몽주의 이 준엄한 제문을 듣고 대소 신료들은 물론 공민왕 까지도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이 처절한 제문에는 김득배의 억을한 죽음에 대해 주어를 빼고 꾸짖고 있다. 하지만 하늘을 원망하고, 운명을 원망하지만, 그게 누구한테 하는 말이겠는가?
이게 바로 진정한 선비다. 하도 요즘 선비들이 썩어 버려서 포은 선생까지 소환한다. 선비는 아닌건 아니잖아라고 말할수 있어야 한다. 그 분 눈치나 살피는 것이 아니라. 설사 그게 목숨을 거는 일일지라도. 하물며 집한칸 때문에 믿음을 손바닥처럼 뒤집는 무리들은 뭐란 말인가?
여기에 정몽주의 제문을 소개한다.
아아 하늘이시여! 나의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아 하늘이시여!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듣건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이치이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는 것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에 홍건적이 난입하자 주상께서 어가를 타고 피난가시니 나라의 운명이 마치 실에 매달린 듯이 위태로웠습니다. 오직 공께서 앞장서 대의(大義)를 부르짖으시니 온 나라가 호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삼한(三韓)의 대업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누구의 공로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로로 덮어주어야 옳습니다.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죄를 자복시킨 뒤에 처형해야 옳습니다.
어찌하여 전쟁터에서 흘린 땀[汗馬]이 마르지 않았고 개선하는 노래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침내 태산 같은 공로를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충성스럽고 장한 혼백이 천추만세토록 반드시 구천(九泉)의 지하에서 눈물을 삼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운명이란 것이 어찌 이러합니까? 어찌 이러합니까?
그리고 저승에 있을 김득배에게도 한 말씀을 지어 올린다.
서생이라 자처하셨으니 글이나 다듬는 것이 어울릴텐데
어찌하여 삼군을 맡아 지휘를 하셨을꼬
충성한 혼 장한 기백 이제는 어디 계신지
머리 돌려 청산을 보니 흰구름만 감도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