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니스구 Jun 19. 2024

여행은 만병통치약

웰컴 투 힐링 호텔

지난달에 유방암 수술을 한 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데도 안 가고 병원, 집, 마트, 도서관만 오가는 생활을 했더니 숨이 턱턱 막히고 우울감이 밀려왔다.


그동안 해오던 웨이트 트레이닝, 필라테스, 골프, 수영, 인라인 스케이트 다 그만두고 한강 걷기만 했더니 운동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기력이 달린다.


하루는 작심을 하고 자양동에서 서울숲까지 한 시간을 걸어갔다. 간 김에 최애 맛집 성수다락의 오므라이스를 사 먹고 핫한 동네까지 간 김에 올 때는 성수동 골목골목을 누비며

팝업스토어, 베이커리 빵집, 옷가게, 소품가게를 기웃기웃하며 장장 세 시간에 걸쳐 2만보를 걷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 재미난 놀이도 두어 번 하고 나니 진이 빠지고 재미없고 충동적으로 산 옷과 신발들만 늘어나고 이건 아니다 싶은 거다.


그러다 지난 금요일, 남편이 친구가 호텔을 잡아놨다며 호텔 가서 하룻밤 자고 오자는 거다.

친구가 호텔을? 우리를 위해? 왜?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콧노래를 부르며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엄청 고심하다

작년에 남편과 성수동 놀러 갔다가 우연히 국내 디자이너가 만든 특이한 블라우스를 남편이 사 준 적이 있어서

그거 입고 가야겠다 싶었다.


최근에 성수동에서 산 라임색 샌들에 하얀 스커트에 네이비 블라우스를 걸치니 완전 맘에 든다. 남편도 이쁘다며 맘에 들어했다.

오후 차를 낸 남편 시간에 맞춰 차를 끌고 남편 회사까지 간 다음, 남편이 운전해서 다시 송도로 향했다. 송도에 무슨 호텔이 있었더라?

 

막상 도착해 보니...

송도에 살고 있는 친구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게스트룸'이었다.


이거 이거.... 또 당했구나 싶었다. 남편은 좀 이런 식이다. 대충 듣고 대충 말하기. 아니면 말고.

게스트룸을 어떻게 호텔로 들을 수가 있나?

레지던스식으로 되어있다는 친구의 말에 시그니엘 같은 호텔로 이해했단다.

반은 입주민이 살고 반은 호텔인.... 그런 호텔.


하아..... 뭐 어찌 됐든 간에 원룸형 콘도식으로 되어 있는 게스트룸은 깨끗한 편이었고 친구네가 깨끗한 침구와 타월까지 따로 갖다 놓은 상태라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오션뷰는 또 끝내주게 멋있었다.  


바다를 옆에 두고 조깅하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아이들, 강아지와 산책 나온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로워 보이고 행복해 보였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 단지라 조용하고 깨끗했다. 잠시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친구부부가 직접 만들어 온 중남미식 샐러드 세비체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는데 새콤 달콤 너무 맛있었다.

남이 해주는 음식은 다 맛있다는 건 진리 중의 진리다.

배달시킨 두부김치, 수육, 보리비빔밥, 떡갈비도 다 맛있어서 오랜만에 과식을 하고 말았다.


서로 못 만나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 부부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은밀한 농담,

중년에 접어든 우리들의 건강상태와 체력이야기,

한 번씩 서로의 배우자를 흉보는 타임까지 적절히 곁들여

우리의 수다는 밤늦도록 이어졌고 침묵 피정하듯 꾹 닫고 지내던 나의 입은 모처럼 맞이하게 된 성인들의 즐거운 대화에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을 때도 있지만 이럴 땐 또 사람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새로운 장소와 환경이 주는 영향도 없지 않으리라.


남편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잔 하는 게 더 '목적'이었겠지만 (위스키 두병과 위스키 잔만 준비하고 나머지 짐은 모두 다 내가 쌌다) 나에게 힐링을 선사하고 싶었단다.

그래 그래. 힐링됐어.

호텔얘기만 안 했으면 더 힐링됐을 거야.  


이전 08화 위로 대신 돈을 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