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대신 돈을 줘
긍정이라는 말은 넣어둬, 제발.
양희은의 <그러라 그래>라는 에세이에 보면 난소암 말기였을 때 보인 지인들의 다채로운 반응들이 나온다.
얼마 못 산다는 말에 정말로 슬퍼한 이가 있었고, 본인이 암에 안 걸려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을 내비친 이가 있었고, 부랴부랴 산부인과 검진을 예약한 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사람을 정리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 대목을 읽으며 참 씁쓸하게 웃으며 격하게 공감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본인이 겪어보지 않은 남의 불행에 대해 참 쉽게 위로들을 한다.
암은 감기 같은 거라는 등 초기에 발견한 게 어디냐 불행 중 다행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등...
한마디 휙 던지면 그걸로 본인 역할 끝인 줄 안다.
그런 얘기 들으면 '헐~ 어디, 너도 한번 감기 같은 암에 걸려 볼래? 하고 꼬인 심보가 되어 버린다.
본인이 먼저 겪어 본 불행이면 "야, 말도 마. 난 더했어!" 하면서 감정 새치기를 한다.
남의 불행에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기가 이렇듯 어렵다.
이럴 땐 그저, "어휴, 너 많이 놀랐겠다. 정말 힘들었겠네." 하면서 손잡고 같이 울어주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은 필요 없다.
돈 주면 금상첨화고.
어쭙잖은 편의점 주스세트나 롤케이크 사 들고 와서 어쩌다 발견했어? 왜 그렇게 됐어? 몇 기래? 재건수술은 어떻게 하는 거야? 하면서
취조하듯이 자기 궁금증 해소하려 드는 인간들 정말 밥맛이다.
참고로 암환자에게 당분이 많이 들어간 주스류나 빵, 케이크류는 독약이다.
6년 전, 환자복 입고 머리도 못 감고 화장도 못하고 추레하게 하고 있을 줄 뻔히 알면서 명품 트렌치코트에 명품가방에 명품구두로 도배를 하고
주스 한 세트 사들고 병문안을 왔던 친구가 있었다.
우린 둘 다 40대였기에 너무 뭘 몰라서 그런가 보다고 넘어갈 10대나 20대가 아니었기에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심지어 내가 아니라 내 남동생이 입원했다는 줄 알고 찾아왔다며
내 인생 최고로 말도 안 되는 별 이상한 개소리를 들었다.
둘째 시이모님은 생전 한 번도 나한테 메시지나 전화 한 통 한 적이 없으시다가 갑자기 대뜸,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등 하나님의 뜻 어쩌고 저쩌고 문자를 보내셔서
교회 안 다니는 나에게 깊은 빡침을 선물해 주었다.
문병도 없었고 선물도 없었다.
하... 나중에 본인 아프실 때 똑같은 메시지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면, 대학원을 다니다가 갑자기 휴학을 하게 돼서 교수님들께 상황 설명을 드리는 메일을 보냈는데
워낙 바쁘신 분들이고 평상시 스타일을 알기에 답장 한 두줄로 끝날 줄 알았다.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다 읽지 못할 만큼 긴 장문의 메일로 위로와 격려를 해주신 교수님들께 정말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날 많이 울었다.
지도교수님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를 적어 주시며 본인의 삶에도 암이 찾아 왔었고 굴곡 없는 삶은 없노라고
자책하며 살지 않기를 바란다고
위로해주셨다.
수술 끝나고 교수님 한분 한분을 찾아뵈었는데 다들 진심으로 기뻐해주셨고 공부보다 건강이 우선이라며 나를 먼저 생각해 주셨다.
그때 배웠다.
성숙한 위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걸.
김포에 사는 큰 시누이는 건대병원까지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문병을 와주셨으며 조심스레 "올케를 위해 내가 기도해도 될까?" 하시며
내 손 꼭 붙잡고 기도해 주고 가셨다. 유전자검사에 보태라며 50만 원이 든 봉투도 덤으로 주고 가셨다.
역시 영혼 없는 휴대폰 메시지보다 자기 시간 내어 찾아와 준 사람들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고
돈을 주거나
퇴원 후 맛있는 건강식 사 준 사람들,
혹은 건강 빨리 회복하라며 블루베리 같은 항산화식품을 몇박스씩 보내주는 맘 착한 여동생이 제일 고맙다.
2018년도에는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이라 병문안도 자유로웠고 한 방 쓰는 환자들끼리 모여서 수다도 떨고 음식도 나눠먹고 그러던 때였다.
환자 중에,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인데 스님이랑 동거를 하다가 스님이 먼저 가슴에 있는 멍울을 발견했다며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한 기이한 경험담을 늘어놓던 이가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입담에 모두 배꼽 잡고 웃었고 자기를 통해서 가발을 맞추면 엄청 할인이 많이 된다며 가발 예약하라는 영업활동에 또 한 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도 저렇게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고 백혈구 수치도 낮았고 병기도 3기였기에 항암치료를 받으며
머리카락도 다 빠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은 방 환자들에게 소소한 웃음거리를 제공해 주었고 그녀가 먼저 퇴원하던 날 섭섭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제일 심각해 보인다며 인생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자며 카바레에 한번 놀러 오라며 명함을 주고 가셨다.
그녀 다운 위로 방식이었다.
얼마 전, 5월 29일, 두 번째 유방암 수술했을 땐, 남편, 아이들, 시어머니, 큰 시누이, 셋째 여동생, 지인 두 명에게만 알렸다.
이젠 나도 성숙한 위로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연락하는 요령이 생겼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고 성숙한 위로를 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