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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니 May 24. 2023

#04

'김치를 다시 먹을 수 있게 된'기분은.

 병원은 올림픽과 코시국을 거치며 다소 유명해진 지역에 있었다. 그렇지만 예전에도, 현재도, 거주자들은 연령대가 높은 편이고, 그래서 내원하는 환자분들도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다. 십 년을 그곳에 있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을 대하다 보면, 사실 의사보다는 손녀의 입장에서 보게 되는 게 좀 있는 것 같다. 턱이 아파 식사를 잘 못하신다거나, 눈 길을 뚫고 하루에 한, 두 대 있는 버스를 타고 오셔서는 돌아가는 차시간때문에 조급해하시거나, 밭에서 따온 옥수수를 직접 쪄서 검은 봉지에 가득 담아와서 주신다거나, 손이 왜 이렇게 차갑냐며(내과는 환자 근육을 촉진하는 일이 많아 느껴지는 모양이다) 손을 잡아주시는, 뭐 그런 모습들이 쌓이고 쌓여 유난히 특정 연령 이상의 분들은 괜히 더 정이 가고 짠하고 신경이 쓰이는 편이다.

 병원이 이사로 정신없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여름쯤 오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 한 분이 손녀와 같이 오셔서는 입안이 화끈거리는데 불편해서 뭘 먹지를 못하겠다고 하셨다. 조금만 자극적인걸 먹어도 아파서, 거의 밍밍한 죽 같은 것밖에 못 드셨다고, 이렇게 된 지 몇십 년이 되었지만 여기저기 병원도 가보고, 한의원도 가봤는데 나아지질 않던 차에 손녀가 와보자고 했다 하셨다. 내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흔한 질환이지만, 아무래도 환자의 입장에서는 주변에서 듣도 보도 못한 증상이면, 우선 걱정이 되고, 병원을 다녀도 나아지질 않으니 암은 아닌지 덜컥 겁부터 나기 마련이다. 진단과 약 설명을 드리고, 괜찮다고 안심시켜 드리고, 그렇게 귀가하셨다가 이 주 뒤에 오셨을 때는 표정이 한결 나아져있었다. (글을 읽고 자가진단하는 오류를 미리 방지하고자, 진단명은 밝히지 않겠다) 물론 이 주 만에 깨끗하게 다 나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몇 주 정도 더 내원하시면서 치료받으셨고, 증상이 없고, 상태도 깨끗한 걸 확인하고, 이제 저 보러 오시지 마시라고, 멀리 안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린 날,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그동안 김치가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내 손으로 몇십 년을 김치를 담갔는데, 그게 어찌나 먹고 싶던지..'라고 하셨다. (아무리 의사고 환자이지만, 사실 손녀뻘임에도, 꼬박꼬박 존대해 주신 게 참 감사한 포인트..! 그래놓고 가실 때는 엉덩이 토닥토닥ㅎ) 그 말이 어찌나 충격이던 지. 그전까지는 겪어보지는 못하고 단지 책과 논문으로만 접했기 때문에 사실 그냥 '불편한', 적당히 있다 없다 하는 근육통 수준의 불편감으로 생각했던 증상이었다. 그랬었는데, 사실은 한 사람을 수십 년 동안 김치도 못 먹게 할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나도 나름 '종합병원'이라, 환자 입장인 경우가 많다.(그래서 건강보험 없는 해외 이민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병원에서 직원이나 의사의 태도 하나하나에 상처받기도 하고, 가끔은 의사를 못 믿기도 한다. 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의사지만, 그래서 조금이나마 '내 환자'들이 겪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내가 사용하는 치료 기계를 써 보고, 장치와 주사치료도 받아보고, 주로 처방하는 약도 먹어봤다.(구강내과 의사지만 사실 나도 턱관절질환이 있다. 정말 재발 쉽고 관리가 중요한데, 세상 일이 안다고 다 되는 건 아닌 법. 내 담당 의사는 우리 과 교수님이셨다. 자기 전공의가 환자랍시고 체어에 앉아있는 상황이란...) 그래도 모든 질병을 겪어볼 수는 없으니 최대한 환자의 말을 많이 들으려고 한다.


  이 글을 왜 쓰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쓰다 보니 변하지 말고 계속 이런 사람 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가면 한 시간 기다려서 의사 보는 건 1분 컷, 3분 컷, 이런 얘기가 있다. 그렇다 보니 구강내과는 자세히 얘기해 주고, 잘 들어주는 게 너무 좋다고, 그런 얘기를 종종 듣는다. 보통 의사 선생님들은 아픈 사람들이 많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나도 요즘은 환자가 많아 한 명 당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데,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점점 말을 빨리하게 되었다.(절대 적게 하지는 않는다. 나란 사람, 말 많은 사람) 우리 환자분들, 빠르게 많은 걸 들었지만, 그래도 잘 듣고 가서 나아서 오셨으면 좋겠는데...


 나도 먹고살아야 하긴 하지만, 세상에 아무도 안 아팠으면 좋겠다 좀. 아픈 사람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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