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ld Robot>을 읽고
겨울 바깥공기는 유난히 차가웠지만, 커튼 사이로 들어온 오후의 햇볕은 침대 위를 천천히 데우고 있었다. 난방 소리가 잦아든 방 안에서, 나는 아홉 살 아들과 이불을 반쯤 덮고 나란히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초등학생 추천서 목록에 늘 빠지지 않는 <The Wild Robot>이었다. 아이는 페이지를 넘기며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나는 습관처럼 아이의 발을 덮어 주며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The Wild Robot>은 어느 날 갑자기 야생 무인도에 떨어진 로봇 로즈의 이야기다. 로즈는 돌봄을 위해,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생존을 계산하고, 위험을 회피하고,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된 로봇이다. 그런 로즈가 문명도, 규칙도, 보호자도 없는 섬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환경에서 말이다.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소리 내어 읽다가 나는 어느 순간 문장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아이를 위해 고른 책이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 이야기가 아이보다 나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로즈가 아무 준비 없이 야생에 떨어져 살아남으려 애쓰는 장면들은, 미국에서 내가 하루하루 버텨냈던 시간들과 겹쳐 보였다.
책 속에서 로즈는 이렇게 말한다.
I was not designed to live on an island.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나 역시 미국에서 그 말 그대로였다. 나는 미국은 여행은 커녕 사는 것은 꿈도 꿔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장을 보고, 영어로 학교 공지를 읽고, 살아내야 했다. 로즈가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언어를 배우고, 숨어야 할 때와 나서야 할 때를 스스로 판단하며 적응해 나간 것처럼 나 역시 영어를 더듬거리며 그렇게 살았다. 이 책은 로봇이 인간처럼 변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낯선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으로 배워야 했던 선택들의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이 로봇이, 이상하게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섬에 떨어진 로즈는 가장 먼저 안전해 보이는 장소를 찾는다. 숲 속 나무 아래에 가만히 서 있다가, 솔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자 이번에는 아무것도 떨어질 수 없는 섬의 꼭대기로 올라간다. 하지만 곧 태풍이 몰아치고, 섬의 꼭대기는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된다. 로즈는 다시 아래로 내려오고, 곰의 습격을 피해 풀더미 속에 몸을 숨기는 법을 배운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했던 장소들이 계속해서 틀렸다는 것을, 몸으로 배워 가는 과정이다.
Sometimes, the safest place is not safe at all.
여기에서 나는 미국에 처음 갔을 때의 나를 떠올렸다. 아이를 데리고 마트에 가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 계산대에서 말을 더듬을까 봐 사람 대신 키오스크를 찾았고, 괜히 말을 걸릴까 봐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집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안전한 생존 방식이었다.
로즈는 우연히 거위 알을 구출하고, 그 알에서 태어난 새끼 거위는 로즈를 엄마로 인식한다. 부모를 잃은 새끼 거위를 돌보는 로즈의 모습은 섬의 동물들에게 신뢰를 얻게 만든다. 로즈는 새끼 거위에게 브라이트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살아간다.
The gosling followed the robot everywhere.
브라이트빌의 존재 덕분에 로즈는 섬에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내가 둘째를 미국에서 출산한 이후의 삶과 닮아 있다. 혼자였다면 말을 걸지 않았을 놀이터 벤치에서, 아이가 모래를 나누어 주는 순간 대화가 시작되었고, 도서관 바닥에 앉아 그림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부모들끼리 웃으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아이는 나를 집 밖으로 끌어내고, 내가 다시 사회의 일부가 되게 만든 존재였다. 그렇게 나도 조금씩 미국에서 세상밖으로 나왔었다.
로즈가 가장 무력해지는 순간은 브라이트빌에게 날아오르는 법을 가르칠 때다. 물에 들어가면 고장 나는 로봇인 로즈는 직접 시범을 보일 수 없다. 다른 새들의 비행을 관찰해 이론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을 뿐,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멀리서 지켜보는 일이다.
Roz could only watch.
나는 아이를 처음 미국 학교에 보내던 날이 떠올랐다. 교실 문 앞에서 아이의 가방 끈을 마지막으로 정리해 주고 돌아서던 순간. 말도 통하지 않는 공간에서 아이가 혼자 앉아 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도와주고 싶지만 할 수 있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시간이었다.
브라이트빌이 처음으로 하늘을 가르다 물 위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나는 책을 잠시 덮어야 했다. 아이는 다음 문장을 재촉했지만, 나는 목이 막혀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책 속에서는 짧은 문장이 이어질 뿐인데, 머릿속에서는 시간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물에 젖은 깃털, 제 몸보다 무거워진 날개, 다시 떠오르려고 발버둥 치는 작은 몸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로즈는 그 장면 앞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물속으로 들어가면 고장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가, 다시 물러서고,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치 발만 허공에서 헛돌고 있는 것처럼.
Her programming told her to flee. Her heart told her to stay.
나 역시 아이의 학교 생활이 힘들어 보일 때 선뜻 해결자로 나서지 못했다.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과, 그럴 수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멈춰 서 있던 로즈의 모습은 너무도 익숙했다. 아이가 울먹이며 돌아오던 날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묻는 말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들. 영어가 짧아 대신 설명해 줄 수도, 대신 싸워줄 수도 없어서 그저 옆에 앉아 등을 쓸어주며 “괜찮아”라고 말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결국 이 장면에서 울었다. 브라이트빌이 물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로즈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파서였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아이의 인생 대신 물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다는 현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가 부모라는 점을 이 장면은 너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 오래 붙잡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는 감각에 가까웠다.
눈물을 닦고 다시 로즈를 생각했다. 로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켜보기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도망치지도, 대신해 주지도 않는 선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마음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선택. 그제야 나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늘 뛰어드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끝까지 지켜보는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브라이트빌은 결국 다른 거위 떼와 함께 따뜻한 곳으로 날아간다. 로즈는 동굴에 혼자 남는다. 아이를 독립시키고 난 뒤, 갑자기 하루가 텅 비어버린 엄마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역시 그 공허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로즈는 추위에 떠는 다른 동물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동굴로 데려와 불을 피워준다.
The cave became a place of warmth.
아이의 자리가 비워진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 사실이 언제나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아이가 스스로 준비물을 챙기고, 실수의 결과를 감당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필요 없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동안 나는 아이를 돌보는 일로 하루를 설명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아이의 독립을 준비시키는 동시에, 나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다시 배우는 중이다. 아이의 자리에 또 다른 돌봄을 억지로 채우기보다는, 관계와 일, 그리고 나만의 시간으로 조금씩 채워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다. 나는 아이가 스스로 준비물을 챙기고 책임을 지도록 연습시키며, 동시에 그 빈자리에 내가 다시 관계와 일을 채울 준비를 하고 있다.
로즈는 원래 야생에서 살도록 설계된 로봇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즈는 섬을 떠나지 않는다.
This island is my home.
한국에서의 삶은 편안하다. 언어도, 문화도 익숙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미국에서 각개전투를 하던 시간들이 그립다. 불편했지만 살아 있었고, 매 순간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미국을 그리워하며 나는 여전히 선택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회사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서 느꼈던 도전 정신을 이어 나만의 일을 만들어갈 것인지. 이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일이란 무엇인가, 집에서 일한다는 것의 의미, 돈이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 현명한 개입이란 무엇인지를 하나씩 묻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The Wild Robot>을 읽으며, 질문은 다시 아이에게로, 그리고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삶을 보여주고 싶은 어른일까. 안정된 선택만을 반복하는 어른일까, 아니면 불확실함 속에서도 배우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어른일까. 아이의 독립 이후 남게 될 나의 삶에는 어떤 관계와 일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아직 답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질문을 끝내 회피하지 않고 계속 품고 살아가겠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교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이 눈물이 나에 대한 연민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불쌍한 엄마, 희생한 엄마, 어쩔 수 없이 멈춰 선 엄마라는 이야기로 이 글을 닫고 싶지 않다. 내가 흘린 눈물은 뒤처졌다는 자책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바라보게 해 준 신호였으면 한다. 아이를 키우며 자꾸 울게 되는 이유는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자동으로 살지 않기 위해 멈춰 서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안다. 그 눈물은 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듯, 나 자신의 다음 단계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며 흘린 이 눈물들이 결국 나를 더 단단한 선택으로 이끌어 준다면, 그것은 연민이 아니라 용기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