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보다는 '불행'을 기준으로 삼아라.
누구든 행복하고 싶지 불행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적이라는 부사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지만 이러한 경향성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누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을까? 불행은 인생에 있어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된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간에, 무시할 수 없는 파급력을 지닌 요소가 있다. 바로 사람이다.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행복할지, 불행할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의 승패가 갈린다. 감정의 밀도도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짜릿하진 않지만 안온한 행복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짜릿하다 못해 날아갈 듯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야 행복할까'라고 질문하는 대신 '어떤 사람을 곁에 둬야 불행하지 않을까'에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행복이란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하겠지만, 나는 크게 괴롭지 않은 상태라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불행을 피하기 위해 '나를 괴롭게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곁에 붙들어두고 싶은 것이다.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는 워딩은 딱 집어 설명하기 어렵다. 불행에는 사람만이 오롯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람 그 자체가 불행을 눈앞까지 끌고 올 수 있지만 상황이 열악해지면 불행이 똬리를 트려는 뱀처럼 슬금슬금 다가오려 하기도 한다. 사람 그 자체는 피하면 그만이지만 불운으로 인한 불행은 피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나를 괴롭게 만들지 않는 일 중 한 가지를 꼽는다면, '나와 의견을 나누며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다. 불운한 사건이 닥치면 사람은 입장이 변하기 마련이다. 사건을 원활하게 해결하면 괴로울 일이 없기에, 함께 해결하고자 의지와 입장의 결을 맞춘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여하튼, 불행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므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나를 불행하게 하지 않을 사람이 보인다면, 그런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혹시라도 사람을 괴롭게 만들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난 언행과 행동들을 자주 돌아보려고 하는 편이다.
행복은, 근본적으로 스스로에 의해서만 느낄 수 있다. 타인에게서 얻는 행복조차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의 과실만을 쫓기보다, 불행이라는 지난한 함정을 피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