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명 남짓의 여인들이 빙 둘러 앉아 카페를 채웠다. 양면 통창을 통해 햇살이 가득 들어와 공간을 채운 12월의 따스한 겨울날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그녀들과 함께 연말 워크샵을 시작하는 오프닝 무대. 감미로운 기타 연주와 함께 제주에 어울리는 노래를 참석자 모두가 함께 부른 뒤 사회자가 나를 불러냈다. 나는 쑥쓰럽지만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무대를 향해 걸어나갔다.
단상이 있지 않은 무대였다. 그저 시선을 모아주는 역할이 전부인 위치. 누군가에게 우러러보여질 자리고 아니고 내려보여질 자리도 아니었다. 관객은 그저 의자에 앉아 있을 뿐. 같은 바닥에서 훌라를 보여줄 예정이다. 나는 공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훌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글자가 없어 이야기를 춤에 담은 것이 훌라이고, 꽃, 바람, 태양과 같은 동작을 보여주었다. 알고 보면 더욱 많이 느껴질거라는 생각에.
“훌라는 맨발이어야 해서, 잠시 신발을 벗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한 쪽 구석으로 걸어가 신발을 벗었다. 내 발을 따스하게 감싸주던 양말과 종아리추위를 막아줄 긴 수면양말까지 벗었다. 다소곳이 벗어둔 신발 위로 양말을 얹었다. 목도리를 풀고, 자켓을 벗었다. 평소완 다른 훌라 옷차림에 가벼운 환호성이 울렸다.
알로하 훌라 미소를 장착하고 음악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자리잡고 시작 포즈를 취했다. 왼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서서 오른발코를 살짝 앞으로 뻗어내고 양손은 차분이 내려 편 자세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2-3초가 흘렀다. 이윽고 음악이 흐르고, 나의 첫 훌라 독무대 공연이 시작되었다.
내가 훌라를 시작한 건 코로나 시국일 때 였으니, 이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모임이 없었고, 공연자리도 없었다. 한 번은 줌으로 훌라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송년회 장기자랑이었는데 줌으로 개최된 지라 거실에 물건들을 한 쪽으로 치운 다음 커튼으로 잡동사니를 가린 무대를 만들어서 짧고 신나는 훌라곡을 선보였다. 1등은 못했지만, 인기상을 수상하여 상금 몇 만원을 벌었다.
이렇게, 누군가의 발치에서 혼자서만 공연을 한 건 처음이었다. 난생처음. 훌라로든 그 어떤 춤으로든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학시절 몇 백명 앞에서 선거유세를 하며 담력을 단련한 후로는, 회사 시절 실적발표든 장기자랑이든 어느 무대에서도 떨린 적은 없었다. 떨림 대신 설레임이 함께 했다.
모두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몇몇은 영상 촬영까지 하고 있었다. 충만한 순간. 이런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관종인가. 세상에 관종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람들의 따스한 눈길은 마음을 치유해주는 효과가 있다. 눈길에는 모든 종류의 감정을 담을 수 있지 않은가. 이 순간 나에게 쏟아지는 눈길에는 놀라움, 신기함, 재미, 의아함, 감탄, 자랑스러움이 담겨있었다.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훌라.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고 행복을 가져다준 훌라를 그들도 알게 해주고 싶었다.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다른 춤들과는 달리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고, 그 무엇보다 자연스러우며, 자연과 벗삼아 평생 출 수 있는 춤이라는 것을. 적어도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관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산들바람을 맞으며 훌라인들과 함께 추는 훌라도 아름답겠지만, 이렇게 소수정예의 특별한 인연들 앞에서 혼자 추는 훌라도 참 뜻깊었다. 나의 강사님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고급진 훌라는 아니었지만, 3년차 훌라인인 나만 할 수 있는, 나만의 훌라 공연이었으리라. 내년의 나, 내후년의 나는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으리라.
공연을 마치고, 찬사를 받으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흥분이 아직 내 몸에 남아 마음이 쿵쾅거렸다. 옆 자리 친한 지인들의 응원의 멘트를 들었다. 너무 행복해 보였다는 말. 아름다웠다는 말. 이런 말을 듣게되다니. 아이, 어쩜 좋아. 골든벨이라도 울리고 싶네그려.
워크샵을 마치고, 식사를 하면서 ‘이전에 알던 훌라에 대한 이미지와는 완전 달랐다. 훌라 좀 가르쳐달라’는 피드백에 다시 한 번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부족한 나이지만, 한 걸음 앞선 사람으로 한 걸음 정도는 걸을 수 있게 이끌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자격증 같은 건 없지만, 시간 내어 나만의 훌라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볼까? 또 하나의 씨앗이 탄생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