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지키려 연인을 버리는 여자와 자기를 버려서까지 여자를 지키는 남자
어느 날부터 내 알고리즘에 어떤 드라마 클립이 뜨기 시작했다. '새벽 두시의 신데렐라'. 또 그저 그런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거나, 그런 이야기를 벗어나는 듯 표방하면서 결국은 신데렐라 결말로 귀결될 것 같은 거부감이 드는 제목이었지만, 계속해서 올라오는 클립이 꽤나 흥미로웠던 나는 어느 날 어떤 드라마인지를 검색하게 된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 소개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12시까지 파티에서 왕자님과 춤을 추던 신데렐라는 마법이 풀린 후
새벽 두시부터 다음날 왕자님이 신데렐라를 찾아올 때까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고, 그래서 기존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벗어난다는 건가 궁금한 마음에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공휴일이었던 관계로 나는 그날 밤을 새서 드라마 마지막편까지 정주행한다.
드라마의 스토리는 이렇다. 재벌 3세인 남자 주인공 서주원이 신분을 속이고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여 본인의 사수이자 여자 주인공인 하윤서와 연애를 한다. 그 관계가 깊어지던 찰나 윤서는 주원이 재벌 3세임을 알게 되고, 그의 어머니이자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회장님을 만나 이별을 종용 받는다. 애초에 너무도 어마무시한 경제적 차이 때문에도 이별을 염두해두고 있었던 현실주의자 윤서는 주원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그렇게 전남친, 전여친이 된 두 사람의 끝없는 밀당과 질척임과 헤어짐의 도돌이표가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남자 주인공인 서주원이 꽤나 귀엽고 잘 생겼으며, 기존의 재벌 3세 스토리 라인을 어느정도 탈피한 점이 흥미로웠기 때문에 킬링 타임용으로 가볍고 재밌게 보고 넘기면 되는 드라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드라마의 어느 부분이, 어떤 대사가 한번씩 내 마음의 어떤 기억을 두드리고 건드리는 것 아닌가.
처음으로 마음을 건드렸던 포인트는 두 사람이 헤어진 후 윤서가 사실은 그동안 주원이 싫어하던 것들을 자신을 위해 맞춰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다. 사실 주원은 매운 것도 못 먹는 맵찔이이고, 어둡고 답답한 것을 싫어해 영화관도 좋아하지 않는데 윤서가 떡볶이와 매운 음식을 너무 좋아하고, 가장 즐겨하는 취미가 영화인 탓에 그들을 1년 반을 사귀는 동안 거의 매번 매운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러 다녔다. 헤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윤서는 주원에게 나를 위해 맞지 않는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었다고 따진다.
나도 그랬다. 내가 오래 고수하고 있는 사랑의 명제가 하나 있다면, 어떤 관계든 한쪽이 희생하게 되는 상황은 희생하는 사람이 그 상대방을 좋아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마음이 식었을 때는 언제든 본인의 희생이 억울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고 결국 보상을 원하게 될 거라고, 그러면 그 상대방은 내가 원하지도 않은 희생 때문에 부채감을 갖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애초에 '둘 다 원하는 걸 하면 되지,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고, 그러니 애초에 성향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윤서에 대한 주원의 무조건적인 맞춤이 나는 숨 막혔고,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주원의 모습을 보면 나의 말과 행동을 귀담아 듣고 보던, 나의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맞춰주던 나의 전 연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모습이 항상 부채감으로 느껴졌고 누군가는 스윗하다고 하는 그의 모습에 화를 냈다. 제발 너는 너로 있으라고, 나를 위해 변하지 말아달라고.
그런 윤서에게 주원은 말한다. 처음에는 윤서에게 맞춘 것이 맞는데 점점 본인도 그 모든 것들이 즐겁고 좋아지더라고. 그걸 좋아하는 네 모습을 보며 함께 즐기다 보니 어느 새 나도 그런 것들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주원을 보자 마치 나의 전 연인이 내게 하는 말 같이 느껴졌다. 우리가 사귀는 동안 그가 내게 비슷한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는 내게 느껴지는 부채감에 그런 말을 들을 여유가 없던 나는 우리가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나서야 갑자기 주원을 통해서 그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상에는 상대방이 싫어지더라도 보상받고 싶은 마음 같은 건 들지 않는 대가 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언가를 돌려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는 사실 자체가 만족스러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부터 맞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과거의 그가 했던 말처럼 대부분의 연인들은 그렇게 '서로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두번째로 뜨끔했던 장면은 헤어진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화를 내던 장면이었다. 윤서는 주원에게 이별을 통보했지만 주원은 이별 후에도 계속해서 윤서에게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다른 재벌 3세들처럼 주원도 본인의 명예와 부를 모두 뿌리치고 가출을 하는데, 그런 주원의 마음이 윤서는 '재수없는 자기만족'이라고 화를 낸다. 그렇게 부와 명예를 버리고 연인을 선택하여 궁상맞게 사는 재벌 3세와 함께 하는 연인의 마음은 마냥 편하겠냐며, 그러나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은 그런 건 모르고 그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이런 것까지 하는 사람이라는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록 재벌 3세는 아니지만 주원과 비슷했던 나의 전 연인에게도 나는 비슷한 것을 느꼈었다. 그가 나를 맞춰주거나 굳이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 순간까지 나를 챙길 때, 나는 부채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이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치 않는 순간까지 나를 배려하는 마음은 나를 향한 사랑이기보다는 그런 배려까지 하는 그 자신의 모습에 그가 취해있는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이 말을 내뱉은 적이 없지만 그와 헤어지고 오랫동안 그가 내게 보인 마음은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그런 윤서에게 주원이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러는 너야 말로 나를 사랑한 적이 있느냐고. 주원의 배경을 알고나서부터 줄곧 본인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내 손을 놓치 않았느냐고. 줄곧 윤서가 혹시 상처받을까 그 걱정 뿐인 자신에게 어떻게 그 마음이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비난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주원의 그 말은 내게 와서 박혔다. 마치 내게 하는 말 같았다. 과거 그에게서 느껴지는 부채감들을 갚아야 하는 순간들이 올까봐, 그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내가 상처받고 아파하는 순간이 올까봐 무서웠던 나는 그의 마음을 현실적인 척 회피하고 외면하고 비난했다. 어쩌면 우리 관계에서 정말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나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너무 나에게만 몰두해서 연인인 그에게 최대한 가시를 세우고 한발자국도 다가오지 못하게 막고 있지는 않았을까? 주원의 말을 통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를 잃어가면서까지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진짜 사랑인가, 나를 잃지 않는 순간까지 나를 지키게 할 수 있는 상대방이 진정한 내 짝인가. 여전히 그 답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통해 내가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과거 그에게서 느꼈던 숨막힘은 어쩌면 그의 탓이 아니라 나의 탓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당시 내 주변인들이 찬양하던 그의 스윗함은 어쩌면 정말 꿀 떨어지는 예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백마 탄 재벌 3세와 꿀 떨어지는 가벼운 드라마인 줄 알았던 드라마는 이렇게 내게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시각과 함께 질문을 던져 두었다.
윤서의 마음은 이기심일까, 사랑일까?
주원의 마음은 자기만족일까, 사랑일까?
그래서 윤서와 주원이 다시 재결합을 하였느냐고? 궁금하다면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시길 바란다. 여러모로 정주행하기 좋은 드라마였으므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