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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Jan 29. 2021

통제와 공감의 경계선에서

육아의 어려움에 대하여

"오늘 저녁에는 누가 먼저 느낌을 얘기할까?"

아버지가 저녁 식사를 마친 자리에서 물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이 모두 모여서 그날 받은 특별한 느낌을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늘 오후에 굉장히 화가 났어요. 우리 모둠이 찾아왔는데 도무지 규칙을 지키지 않는 거예요. 그 애들 중에서 한 남자 애가, 이름은 잘 모르겠고, 미끄럼틀 줄을 자꾸 새치기하는 거예요. 애들이 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말이에요. 그 애 때문에 정말 화가 났어요. 그래서 주먹을 쥐어 보였어요. 이렇게."

어머니가 물었다.

"찾아온 아이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생각이 어째서 들었니?"


"걔들은 규칙이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면 단지 너희 놀이터 규칙을 몰랐을 뿐일 거라고 말이야."

릴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릴리, 네 말을 들으면서 나는 너희 놀이터 규칙을 지키지 않은 그 아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단다. 넌 그 아이가 알지도 못하는 규칙이 있는 새로운 곳에서 낯설고 어색하게 느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니?"

한참 생각하더니 릴리가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조너스가 말했다.

"난 그 애한테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 앨 알지는 못하지만 말이야.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 드는 곳에 있게 될 모든 이들에게 미안해."

아버지가 물었다.

"이제 기분이 어떠니, 릴리? 아직도 화가 나니?"

릴리가 방글방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뇨, 오히려 걔한테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어요. 주먹을 쥐어 보여서 미안해요."


(일부 생략된 문장이 있음을 명시)



얼마 전에 읽은 <더 기버>의 속의 한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참으로 화목한 가정이라고 여겼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앉아서 그날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기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 서로 나누는 모습이 참으로 바람직하다 여겼다. 하지만 이 장면이 감정을 일반화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됐을 때, 마치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누군가 미끄럼틀 타는 순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앞에 끼어드는 것을 봤을 때, 여동생 릴리가 느꼈던 건은 단순한 짜증과 화였음에 불구하고 엄마는 릴리가 느끼는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을 잘못된 것이라 말한다. 그런 일로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엄연히 끼어든 사람의 잘못이라는 게 분명함에도 그 친구가 규칙을 잘 몰랐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 아이를 두둔한다. 그리고 릴리로 하여금 미안한 감정을 가지도록 만들어 그녀가 느꼈던 단순한 화와 짜증을 용납되지 않는 감정으로 만들어 버린다. 즉, 화나 분노를 느끼는 것이 잘못이라 가르치는 것이다. 이 장면은 가족애가 넘치는 가정의 훈훈한 모습이 아닌, 그저 자기감정의 통제를 스스로 익히도록 강요하는 모습일 뿐이었다.



얼마 전에 첫째와 둘째 치과 정기검진이 있어서 치과를 다녀온 일이 있다. 그전에 몇 차례 치과에 갈 것임을 미리 일러두었지만, 유치원 방과 후에 원을 나와서 이제 치과에 간다고 하자마자 그때부터 첫째 아이의 징징거림이 시작되었다.


아이의 감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마 이전의 충치 치료 경험(당시 땀으로 샤워를 했던)은 치과에 대한 두려움을 낳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치과에 도착할 때까지 징징거리며 온 몸으로 분출하는 짜증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의 마음은 이해를 하지만 울음과 짜증이 길어지면 평정심이 흐트러지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좋은 말로 충분히 설득하고 설명했다는 일정 기준이 채워지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그만하라고 화를 내게 되는데, 요즘은 그렇게 화를 내는 것보다 (물론 화의 다른 모습이겠지만) 차라리 냉정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과에 가지 않게 되는 건 아니야. 울어도 갈 거고, 안 울어도 갈 거야. 그러니 잘 생각해봐.’


말을 하면서도 이게 이제 막 7살이 된 어린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다. 갑자기 싸늘해진 나의 말투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말하는 내용을 알아들은 탓인지. 혹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인지.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인지. 아이의 울음과 짜증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며칠간 ‘통제’라는 말에 대해 자꾸 생각이 났다. 육아를 하는 것이 결국 아이들을 통제하려고 드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많은 육아서에서 올바른 육아법으로 아이들의 감정에 대한 인정과 공감을 이야기한다. 나 역시 동감한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공감인지 헷갈린다. 치과에 가기 싫은 아이의 마음을 인정하고 공감하여, 울어도 된다 한 것 까지가 공감인가?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 ‘울든 안 울든 치과에 갈 것’이라 말하는 것은 결국 울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그럼 나는 최종적으로는 공감을 한 게 아니란 말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자 나 스스로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간 내가 아이에게 ‘괜찮다’ 했던 그 모든 것들이 공감을 하기보다는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통제였던 것인가 라는 결론으로 내딛자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자유로운 아이로 크기를 원하지만 사회성을 갖추고 예의를 지키는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기분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적고 보니 참으로 엄친아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강요할 때엔 아마 그것이 통제가  것이다. 아마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본인이 나로부터 답답함을 느끼고 탈출구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이 바로 통제겠지. 이를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 훌륭한 육아 일터인데, 그런데 따지고 보면 유도한다는  자체도 결국 원하는 모습을 이끌어내기 위한  다른 돌려치기 아닌가? 갑자기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버린 것만 같다. 육아가 참으로 어렵다고 느낀다. 특히 아이가 내가 바라는 모습에 일치하지 않을 때엔 괴롭다. 어리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점차 학령기에 접어들어가니 슬슬 걱정이 커진다. 조금  크면 괜찮아지겠지 싶으면서도 어릴 때부터 바로 잡아줘야 하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있는 걸 지도 모르겠다. 부모로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통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정답이겠지. 내가 그리는 어떤 모습에 끼워 맞추기 위해 유도도 협박도 아닌 상황 자체에서 표현되는 아이의 감정, 그리고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 (언제나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작은 실천 하나를 다짐해 본다. 우선 덧붙이는 것을 한 번 빼볼까 싶다. 예를 들어 넘어져서 우는 아이를 보고 ‘아프겠다’라는 말이면 족할 것을 거기다 덧붙이는 ‘주머니에 손을 빼고 걸었어야지’ 혹은 ‘앞을 똑바로 보고 걸었어야지’ 같은 말을 참는 거다. (덧붙이는 말에는 묘하게 화나 짜증이 섞이게 된다.) 이런 예시는 무수히 많다. 동생이랑 놀다가 장난감을 뺏겨서 울 때, ‘속상하지’로 끝내야지. ‘울지 말고 다시 달라고 똑바로 이야기해’라는 말 같은 건 하지 말자는 거다. 물론 아름답고 우아한 말씨로 ‘우는 것보다는 동생에게 다시 달라고 이야기해볼래?’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덧붙여도 되리라. 하지만 그 덧붙이는 말에 아이의 현재 모습이 불만스러워 그 행동을 채근하고자 하는 의도가 묻게 되는 거라면 차라리 생략하는 게 낫지 않을까?


‘굳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생략함으로써 아이에게 내가 원하는 모습을 강요하지 않도록 조금씩 고쳐나가야겠다. 물론 더 좋은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감정이 격해있지 않은 상황에서 꾸준하게 가르쳐야 할 것들이다. 굳이 감정이 격해진 상횡에서 나의 성질에 못 이겨하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통제와 공감의 경계선에서 날카로워지고 싶다. 이 역시 많은 연습이 필요하리라. 인지를 했으니 차츰 실천하는 일밖에 없다. 한 번씩 그럴 때엔 더 기버를 떠올려야지. 화목한 가족회의 시간이라 속아 넘어갈 뻔했던 그 장면을 자꾸 떠올리면서 우리 아이들이 적어도 내 앞에서만은 자기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나의 문을 항상 열어두어야겠다 다짐해본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더 기버> 제공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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