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평안하기를
갈라파고스 제도로부터 떠나와서 175년간을 살아온 거북 해리엇의 이야기는 <긴긴밤>만큼이나 긴 여운을 주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아기 원숭이 '찰리'이지만 끝맺음은 바다거북 '해리엇'으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해리엇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보여주며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지나가고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내 인생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그런 일들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겠구나를 깨닫게 된 나는 어른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 <해리엇> 속에는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기 원숭이 찰리는 생존에만 급급했던 숲에서의 삶을 지나 인간이라는 존재와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습성을 파악하고 애완동물로서의 삶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안락한 시간은 짧게 끝이 나고 어린 존재는 숲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엄마도 없고, 자기와 함께 놀아주던 인간 친구도 없는 동물원에 마지막으로 당도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혼자'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동물원은 실질적인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곳이지만 그것과 다르게 다른 동물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새로운 룰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찰리는 동물원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개코원숭이 '스미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인간과 함께 살면서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들의 사용법도 알게 된 찰리는 동물원에 들어오기 전에 우연히 열쇠를 숨겨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을 스미스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스미스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는 찰리는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괴롭힘은 시작된다. 공격하는 일당 대부분이 그렇듯 스미스는 자신이 거느리는 무리의 힘과 홀로 있는 상대방의 나약함을 약점 삼아 작은 존재를 위협하고 협박한다.
그런 찰리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것이 바로 해리엇이다. 해리엇은 찰리와 스미스의 가운데서 스미스를 비난하지 않은 채 찰리를 지켜준다. 나는 그것이 좀 의아했다. 누가 봐도 스미스는 나쁜 악당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해리엇이 그를 비난하지 않고 훈계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해리엇은 스미스가 하는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만 지적할 뿐 이래라저래라 설교를 늘어놓지 않았다. 게다가 오히려 찰리에게 그를 이해하라고 말한다. 원래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 동물원에서 해리엇의 도움을 받지 않은 동물들은 없다. 해리엇은 긴 삶을 유지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동물원에서 몸소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해리엇은 이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남은 동물들은 그런 그를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슬퍼한다. 해리엇은 괜찮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이때부터 이야기의 주인공은 찰리에서 해리엇으로 넘어가면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래전 찰스 다윈의 연구로 인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호주의 한 동물원으로 오게 된 그는 고향을 떠나서 동물원에 오기까지 자기보다 나이가 많았던 나이 든 거북들의 희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은 자신이 잘 살아남아 다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라 여긴다.
고향을 떠나서 운이 좋게 목숨을 부지하고 오랜 시간을 살아온 거북은 이제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남은 소원은 다시 바다로 가는 것이다. 바다에 닿으면 그 물이 자신을 갈라파고스 제도 자신의 고향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는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옮겨줄 이동수단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를 차로 이동시켜 주지 않는 이상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싶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찰리에게 아직 열쇠가 남아있던 것이다.
해리엇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친구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을 다시 해리엇에게 돌려주기 위해 진심으로 그의 탈출을 돕는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헤리엇을 바다로 보내기 위한 동물들의 노력이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그 장면은 책을 읽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일 것이다. 악당으로 구분되었던 스미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한다. 그가 극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눈물겨운 장면은 그려지지 않지만 적어도 찰리를 괴롭히는 일은 멈추게 된다. (스미스의 새끼가 위급한 사고를 당하는데 이때 찰리가 열쇠를 사용하여 도와준다)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다른 동물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감을 몸소 알게 해 준 해리엇의 가르침에 보답하기 위해 그를 바다로 데려다주는 미션에 함께한다. 그토록 바라던 동물원 밖으로 나온 수 있게 된 스미스,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작가는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둔 채 다시 해리엇의 시선으로 돌아간다.
해리엇은 어떻게 됐을까?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가 고향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도착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바다에 닿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미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말이다.
좋은 책은 긴 여운을 주고 그런 책은 어떤 장면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마치 내가 영화를 본 것처럼 넓고 푸른 그리고 맑고 깨끗한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리엇의 모습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재생되었다. 그는 이제 자기 삶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다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저 바닷물에 몸을 맡기는 것뿐 더 이상 할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할 해리엇을 상상하니 절로 그가 부러웠고, 수고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가고 있을까? 해리엇과 같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를 자연스럽게 반문하게 된다. 해리엇은 서로 대치하는 찰리와 스미스에게 동물원에 있는 모든 존재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한다. 더 이상 생존의 경쟁이 없어진 이곳에서 게다가 사람들의 감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가 미워하는 것은 너무 불행하다고 말이다. 언젠가는 모두가 죽는다. 본인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이곳은 따뜻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해리엇. 어쩌면 그의 말은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어디에서든 만족하고 긍정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과 어디에서든 불만을 내세우며 날을 세우는 사람의 차이는 큰게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보기에 해리엇이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나태한 존재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는 살아있는 동안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물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방관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비난하지도, 이래라저래라 지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를 저었을 뿐이다. 그리고 모두가 다 같이 노를 저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작은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를 통해 목소리 높여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배운다. 내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잘난 것 같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임을 다시 배운다. 나를 내세우는 것보다 내 주변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어른의 역할임을 다시 알게 해 준 고마운 해리엇. 갈라파고스 제도 어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그를 상상하며 나의 미래도 그와 같기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