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기
한평생 살면서 다이어트랑 거리가 먼 사람도 있겠지만 인생의 어떤 시기에 다이어트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지나간 사람이 있을까? 특히 자신의 외모에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청소년기에 다이어트에 대한 고민 한 번 하지 않은 친구들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실로 내가 그랬고, 내 친구들이 그랬다.
특히 청소년기의 친구들에게 외모는 그 어느 시기보다 예민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지만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 고민하고 더 나아가 자책하며 또 괴로워한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는 것 같다. 서양 하이틴 영화에서도 소위 '인싸'라고 말하는 여학생이 남들 앞에서 먹을 거 다 먹고 화장실에 가서 다 게워내는 장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당시 내가 그들과 동년배일 때에는 뭘 저렇게 까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이제 와서 그들의 심경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 더욱 안쓰럽고 안쓰럽다.
내 주변에는 예쁜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못생김이 폭발하는 중고등학교 시절, 또래의 비슷한 외모를 가진 친구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예쁜 친구들은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리고 게 중엔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말 그대로 주변 사람들을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독보적인 외모를 가진 친구들이 몇몇 존재한다. 그리고 나랑 관계없을 것 같은 그런 미모의 소유자 중 한 명이 바로 나의 절친이었다. 누가 봐도 '미녀'라고 생각할 법한 외모를 가진 아이, 미모로 동네에 명성이 자자했던 그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나의 첫 짝꿍이었고 얼마 가지 않아 우리는 절친이 되었다.
보기와 달리 굉장히 털털한 그녀는 외모로 괴로워(?) 하는 나에게 '객관적으로 너를 평가하면 'B' 등급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나의 괴로움을 달래주려 애썼다. 왜냐하면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C'등급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는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외모인데 왜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느냐가 요지였다. 당시의 나는 그랬다. 그 친구를 시기도 질투도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친구를 보면서 나의 외모를 비하했고, 나를 두고 아무도 못생겼다 말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못난 외모의 소유자라 여기며 좌절했다. 그리고 그런 외모 비하는 사실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애 둘을 낳고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진 누가 봐도 아줌마가 된 이 나이가 돼서야 더 이상 외모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지금 한창 외모로 고민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을 볼 때면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시절이 참으로 후회가 된다. 좀 덜 그랬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왜 그리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다이어트 학교> 속 '외모가 곧 경쟁력'이라고 외쳐대는 마주리 원장이 자신의 잘못된 원칙을 기준으로 아이들의 자존감을 묵살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모습이었기에 더욱 씁쓸했다. 외모로 이득을 본 삶을 살아온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로 인해 불이익을 보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싶을 정도로 남들보다 좀 더 예쁘장한 외모가 똑같은 일을 해도 좀 더 빛을 본다는 사실을 조금씩 인지한다. 그리 보면 어쩌면 나는 불이익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일들을 떠올려 볼 때, 만약 내가 좀 더 예쁜 외모의 소유자였더라면, 좀 더 날씬한 몸매를 가졌더라면 상황이 조금 달라지긴 했겠지? 그런 맥락에서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도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결국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애정을 갖고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객관적으로 그럴듯한 외모는 처음 시작을 가능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외모는 부수적인 것이 된다. (관계를 시작하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누군가 의의를 제기한다면 그건 나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지금으로서는 외모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말 밖에 해 줄 말이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외모보다는 부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모든 것이 그 관계를 좌우하는 핵심이 된다. 평소의 말투, 상대를 배려하는 행동, 마음 씀씀이, 가치관 등이 관계를 이어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이다.
외모가 선입견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는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게다가 그것이 득인지 실 인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봐도 미인이었던 내 친구는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는 말을 갖다 붙이며 이상한 루머도 만들어 댔다. 예쁘면 예쁜대로 나름의 고충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다는 것, 내가 부러워하는 누군가의 삶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마주리 원장의 가스 라이팅에 넘어가지 않은 홍희는 자기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그건 간단한 것이었다. 남들이 보는 기준을 절대적인 잣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 '나는 나고 타인은 타인이다' 물론 홍희처럼 단단한 마음을 갖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존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충분히 쌓아갈 수 있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힘들게 운동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바라는 모습의 기준을 스스로가 정했으면 좋겠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그 기준이 자신이 세운 것이기를 바란다. 나의 현재 상태와 상관없이 이 사이즈는 돼야지 남들이 인정해주겠지 라는 그런 거 말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 옛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던 내가 남들의 기준에 맞춰 휘둘린 삶을 살았던 것은 어쩌면 자가당착인 일일지도 모른다. 자기가 원하는 것, 싫은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은 아마 그 기준을 스스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백설공주 속 여왕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구나 알았으면 싶다. 그녀는 아마 잘 꾸미는 세련된 여성이었을 텐데 어쩌면 자기보다 한참 촌스러웠을 백설공주를 시기하며 어리석은 일을 반복한다. 그 거울이 뭐라고 말이다. 거울의 말에 휘둘리며 살았던 불쌍한 그녀를 떠올리며 우리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기를 기대한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는 시간에 나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나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 고민하고 알아가자. 내 인생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한낯 거울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을 길러나가자. 그건 특별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뭐가 되든지 간에 꾸준히 열심히 해나가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선물이라는 걸 기억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