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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May 18. 2022

살면서 다 니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 그게 인생이라.

부모가 돼서 그런가 지금 한창 방영 중에 있는 드라마 속 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과몰입하게 된다. 극 중 고등학생 커플이 임신을 해서 부모와 갈등을 일으키는 이야기인데, 아이들의 예쁜 사랑보다는 속이 썩어 나갈 부모의 마음에 빙의하여 보는 내내 마음 아파하며 혼잣말을 구시렁댔다. 사고를 친 커플을 마냥 어리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저 아직 철이 덜 들었네 싶어지는 건 아마 내가 부모가 되어 봤으니 할 수 있는 한탄 이리라. 앞날 창창한 전교 1등 하는 딸내미가 졸업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해버렸다는 소식에, 그에 뒤질세라 못지않게 똑똑하고 잘난 아들이 여자 친구와 아이를 위해 돈을 벌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선포에, 밤잠을 못 이루는 아빠들의 절망이 너무도 마음에 와닿아 그들의 행태에 쯧쯧 혀를 차면서 볼 수밖에 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에피소드의 가운데 임신을 한 여자 아이의 아빠가 선생님을 뵙고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힘이 빠진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딸은 운동장에서 자신을 본채 만채 돌아서는 아빠를 부르며 이번에도 자기한테 져주라고 울면서 소리친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아이를 낳겠다고 한 자신을 이해해주는데 왜 아빠만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느냐고 외치는 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부모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부모야 말로 진짜 네 편이니까', 앞 날 창창한, 무려 전교 1등씩이나 하는, 서울대 의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예쁜 딸이 갑자기 애를 낳겠다는데! 그 편을 들어줄 수 없는 아빠의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가 돼서 눈물이 찡하게 났다. 아빠가 없어서 외롭다고 울부짖는 딸을 뒤로한 채 눈물을 삼키는 아빠의 심정을 딸이 어찌 알 수 있을까. (아마 그녀는 이른 임신 덕에 곧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늘 딸에게 졌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다며 아빠가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이 있다.

 살면서 뭐든 다 니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 그게 인생이라.

그 대사에 우리 아빠의 목소리가 오버랩되었다.  


학창 시절 엄청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공부 좀 한다고 자부했던 나는 집에서 똑똑한 척하면서 가족들 앞에서 잘난 척 해대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며 대화의 말미에 '인생이 네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계획대로 척척 흘러갈 것 같으냐,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종종 남기셨다. 그 말은 아빠가 나에게 경고장을 던지듯 하던 말씀도 아니었고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쯤에 슬그머니 흘리시면 했던 말인지라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아빠의 그 말씀은 선지자의 예언처럼 딱 맞아 들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주름잡던 지난날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당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겪은 아빠에게 인생의 쓴맛이라고는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철부지 딸내미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우습게 들렸을까. 그런 건 알지도 못한 채 나 혼자 똑똑한 듯 열변을 토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진짜로 그랬다.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혹은 내가 막연하게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드라마  여자 주인공들처럼 예쁜 외모를 가지고, 좋은 직업을 갖고, 돈도 많이 벌고, 나한테 죽고  사는 능력 좋고 인물도 좋은 남자를 만나서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몰면서 우아하게  거라고 당연시 여겼던 미래의 모습은 그야말로 과대망상증의 말기 환자가 꿈꾸는 망상이었다.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드라마   대사가 참으로 와닿았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 그게 인생이라는 . 아이를 떼려고 이리저리 시도하다가 결국 낳기로 결심한 커플이 그리는 앞으로의 미래는 얼마나 찬란하게 빛이 났을까. 하지만 그들이 계획하는 미래는 너무나도 눈부셔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과연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어떤 건지 알고 낳겠다는 겐지. 서울대 의대를 가는  멀쩡한 체력과 정신을 갖고 있어도 힘든 일일 텐데, 임신한 상태로 도대체 공부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설사 대학을 가더라도 어떻게 공부를 하겠다는 것인지... 나도 모르게 현실적인 문제들을 떠올리며 저들이 처한 현실이 정말 말도  되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과몰입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부모가 된다는 건 그들의 결심하는 각오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즐겨 듣는 라디오 방송에서 'adulting'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해 소개하던 멘트가 떠올랐다. '어른들이 하는 일을 하는 것, 책임감 있는 어른의 특성에 맞게 행동하는 것' 이 단어는 진짜 어른이 어떤 것인지, 단지 신체적 나이가 드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다. 철부지 커플에게 '너희가 지금 어른이니?'라고 묻고 싶었다. 아이를 떼라는 게 아니라, 어떤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아이들이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함께 감당해 내야 할 부모들이 더없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내가 아빠와 대거리를 하던 그때만 해도 지금의 그들보다는 나이가 많았던 대학생 시절이었는데. 그때의 내가 애를 낳는 것도 상상이 안되는데, 아직 고등학생밖에 안된 아이들이 어찌 애를 낳아서 살아갈 수 있으려나. 과도한 상상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과몰입이 문제다.

 

그렇다면 인생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알게 될 때쯤 우리는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글쎄. 나는 이제 인생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지만 아직은 완벽한 어른이 되었다고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부모가 되든 되지 않든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자식을 낳고 낳지 않고를 떠나 제대로 된 한 인간으로서의 어른이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생애에 걸쳐 해내야 하는 한 과업 일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과업을 잘 수행해 내고 있는 것일까를 돌이켜 보게 된다. 누가 보아도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한 명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두 자녀의 부모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한 물음이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게 남았다고 여겨지는 앞으로의 긴 시간이 참으로 귀한 것이구나 깨닫게 된다. 늘 조급해하는 나에게 현자들은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고 말한다. 그건 아마 내가 가르치는 우리 아이들을 보는 시선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인생이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의 어른이 된 지금, 용한 점집을 찾아가고픈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 것. 그것이 불혹을 눈앞에 둔 내가 이뤄내야 할 당장의 과제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너무 시답잖은 결론이 되는 것일까.


아무튼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과몰입으로 인한 글쓰기가 여기까지 흘러왔건만 뭘 쓰려고 했는지... 조금 한심한 생각이 드는 마무리이지만 일단은 점집엔 가지 않는 걸로 마음을 다잡은 것으로, 나를 위한 글쓰기가 마무리된 것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 표지 사진 출처 : <우리들의 블루스>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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