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바리 4회 차 책인 『숨그네』는 수용소 문학이다. 작가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독일계 소수민족이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는데, 2차 대전 때 독일이 패망하면서 독일 편에 섰던 루마니아도 함께 몰락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크게 피해 입은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가 자국의 피해복구를 위해 루마니아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을 노동력으로 제공하기를 요구해서 이들 역시 수용소 생활을 했다고 한다. 몰락했어도 강대국인 독일 대신 상대적으로 약한 루마니아를 노린 의도였을 것이다. 강제수용소를 운영한 건 독일 뿐이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역사를 무척 편파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트레바리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내용이었다.
[줄거리]
소설은 위의 배경 설명에 나온 루마니아에 살다가 러시아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게 된 독일인 '레오'가 수용소에서의 삶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게이인 레오는 원래부터 비좁은 시골마을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에 가게 되는 것을 크게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레오의 착각이었을 뿐, 수용소에 사는 5년간 허기와 추위로 인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의 삶이다. 수용소에서는 함께 한 사람들과 동료의식이라도 가질 수 있었으나,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가족들은 자신을 죽었다고 믿고 동생 로베르트를 낳아 멀쩡히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오는 집에 돌아와서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용소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생활도 오래가지 못하여 결국 레오는 혼자가 된다.
[껍데기만 남은 삶]
2019년 뮌헨으로 여행 갔을 때 뮌헨 근처에 있는 다하우 나치 수용소에 간 적이 있다. 독일 역사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닌데 같이 갔던 친구가 독일어를 전공한 동생으로부터 나치 수용소에 가보라는 추천을 받아서 가게 됐다. 수용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집합을 위한 공터를 중심으로 세면실, 화장실, 탈의실, 침실이 있고 외부에는 밭이 있었다. 공터 구석 깊숙한 곳에는 '샤워'장과 시신을 태우는 가마가 있었고. 레오가 끌려갔던 러시아 수용소와는 다르겠지만, 각 건물 안에는 당시 희생자들이 수용소에 들어오자마자 빼앗긴 소지품, 사람들의 신상이 적힌 표, 일당이 적힌 종이처럼 숨그네 속 장면들을 떠올릴 만한 구체적인 사료들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역사의 현장이 생생하게 보존된 곳이었지만,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던 우리 일행은 수용소에 머무는 내내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곳에 머물렀다. 서로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감정을 가지고 수용소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몰랐고, 무지로부터 나오는 얕은 감상을 내뱉는 것은 희생자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였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수용소를 떠난 이후 마음속 서랍 깊은 곳에 넣고 닫아두었다. 버릴 순 없지만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는 오래된 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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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지난 이번 한 달 동안 닫아두었던 서랍을 다시 열었다. 레오가 회고하는 사건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기억 속에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수용소에 사람들의 메마른 삶의 모습이 덧입혀졌다. 수용소는 단순히 사람들의 육체만 혹사시키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빈 껍데기로 만드는 곳이었다. 끌려온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다른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된다. 수용소에서의 규칙은 불문율이기 때문에 개개인들은 통제와 감시를 통해 전체 속의 일부가 된다. 노동이라는 목표를 위해 설계된 완벽한 기계 부품으로써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것들의 부피가 줄어들고(p.23), 시간을 재는데 시계는 필요가 없으며(p.110),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고(p.167), 레오는 자신을 다시 교육한다(p.182). 어쩌다 감정이 흔들릴 때는 상처를 향수 잃은 메마른 이야기로 뒤바꾼다(p.213). 햇빛 아래 수용소가 텅 빈 마을이 될 때조차 혼자가 될 수는 없다(p.227). '반 시게루'이라는 일본의 건축가가 있다. 이분은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임시로 지낼 수 있는 건물을 만든다. 그중 유명한 것이 동일본 대지진 때 설치했던 임시 대피소인데,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이 없을 때 진정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 대피소는 격자로 놓인 기둥들을 중심으로 커튼을 쳐서 대피소의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레오는 텅 빈 수용소에서도 혼자가 될 수는 없었다고 회고한다. 수용소에서의 삶이 재난민의 삶보다 못하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면서 수많은 사람이 재난보다 더한 상황을 5년이나 겪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황망했다. 개인이 아닌 공동의 일부로 살아가는 삶의 무게는 '일의 경과' 챕터(p.255)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의 사건에 연관된 다양한 입장들을 한 페이지에 이르는 긴 한 문장으로 묘사함으로써 수용소에서의 삶은 한 개인이 그 모든 상황을 모두 감내하며 살아가야 함을 문학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귀향 직전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준 것은, 이들을 적어도 사람의 몰골로 돌려보내야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의 삶이 생각만큼은 끔찍하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라는 러시아인들의 전략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래 간직한 향수는 새로 돋아나는 성급한 살과 섞여 푸석푸석 살이 쪄갔다. "(p.291 아래에서 세 번째 줄)는 문장을 보면 살이 오른 사람들의 모습은 겉모습만 빈약하게 치장한 빈 껍데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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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나마 손수건만큼의 희망을 가졌던 레오의 삶은 귀향 후 자신을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로 인해 완전히 비어버린다는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삶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자신을 평화로운 일상의 방해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부정이 뭉친 덩어리로 보는 시선은 어땠을까? "너 빈에 아이 있니(p.304)"라는 아버지의 물음은 이 책을 통틀어서 가장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문장이었다. 귀향 전 부분을 읽는 내내 수용소에서의 삶이 언제쯤 끝날지 애가 탔던 내 마음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툭 끊겼다. 가족들이 이미 오래전 가슴속에서 자신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이 책의 가장 큰 절망감은 가족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순간 파도처럼 다가온다. 레오가 떠난 뒤 아들을 잃었다는 상실감은 가족들을 절망 속으로 끌어들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일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로베르트를 낳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레오를 잊고 로베르트와 다시 일상을 꾸려가던 중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 레오가 살아 돌아왔다. 가족들은 레오와 마주쳤을 때 부모가 자기 자식을 마음속으로 포기했다는 것, 그리고 그를 대신해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는 것을 당사자에게 들켰다는 수치심에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가족들의 심정을 짐작하고 나니, 레오가 품었던 희망과 가족들이 선택한 희망이 어긋났고 그 원인이 전혀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까웠다. 레오와 가족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