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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준 Mar 02. 2022

무시해야 사랑할 수 있는 부녀 사이

나는 앞으로도 아빠에게 살갑고 사랑스러운 딸은 못 될 거야.


우리 아빠는 경상도 아빠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가부장적인데 츤데레랄까.


기억에 남는 아빠와의 장면을   가지 꼽으라면

빼빼로데이 서프라이즈".


빼빼로를 서프라이즈로  주려고

아빠 혼자 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마트에  엄마랑 우리 자매한테 딱 들켜

화들짝 놀랐던 귀여운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귀여울  한없이 귀여운데,

성질 더러울  한없이 더럽다.


그런데 우리집에서  성질하는  다른 사람은

바로 나야 .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가운 부녀 사이는 아니다.

적당히 친하고 적당히 서로를 무시(?)한다.


여기서 무시는 패륜아적이고

방치형 부모적인 무시는 아니다.


약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휴,  저러네..' 정도의 무시랄까.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면 싸우기 때문에,

무시는 '그냥 넘어가자.'하는 최선의 마음가짐이다.

그래야 우리 사이의 친밀함을 지킬 수 있다.



어쩌다 아빠랑 둘이서만 저녁을 먹게 됐다.

저녁 메뉴는 로제 찜닭.


아빠는 지난번에 로제를 먹으며

흙색 음식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했었지만,

내가 먹고 싶어서 그냥 포장해갔다!(당당)


아마 아빠는 내가   로제 찜닭을 보고는

속으로 '  이러네.'했을  같다.


그렇게 아빠는 나를 한번  무시해 주고는 

같이 로제 찜닭을 먹었다.


'뭔가 심심하니 소스가 필요한데..'

같이 딸려  노란 패키지를 뜯어본다.


알고 보니 로제 소스에  비벼 먹을  쓰는

참기름 패키지였다.


"에이, 참기름이네."

하고는 옆에 내려놨다.


아빠가 아깝다고 달라고 한다.

줬더니 밥에 한가득 넣는다.


내가 "참기름 그렇게 많이 넣으면 쓸 걸?!" 하니,

친히 내 밥그릇에도 참기름을 넣어주는 아빠.


난 참기름 먹기 싫어서 옆에 놔둔 건데.


속으로 '어휴, 진짜' 하고는

참기름을 밥에  섞어본다.


나름 고소하니 맛은 괜찮네.


http://enews.imbc.com/News/RetrieveNewsInfo/339466


둘이서 저녁을 먹으며 "놀면 뭐하니?" 봤다.


아빠랑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 개그맨들이

은퇴에 관한 얘기를 했다.


밥그릇 너머로 쓸쓸한 아빠의 말 한마디가 들려온다.


"아빠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같은데,

쟤네는 벌써 은퇴를 얘기하네.."


아빠는 지금 택시 기사로 일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택배 기사, 공장 직원,

그전에는 망한 횟집의 사장으로 10년을 일했다.


모두 아빠가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었다.


아빠는 우리 자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기에.


"아빠, 스웨덴에 110 블로거 할머니 그러는데,

인생은 100세부터래!


그러니까 아빠는 청춘까지 앞으로

40 넘게 남은 거야."


로제 찜닭 소스를 밥그릇에 비비며,

무심히 위로의 말을 건네보는 딸이다.



하지만 그 위로는 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빠는,

100세까지 사는 것도 별로다,

주변 사람들이 죽는 걸 지켜봐야 한다.

하면서 또 시니컬해진다.


나는 속으로,

'어휴, 또 저러네.'

하고는 밥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근다.


"아빠,

냉장고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다 놨으니 먹어."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게 내가 아빠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기에.


아빠의 부정적인 마음을

애교와 사랑으로 녹일  있는 그런 기술은 내게 없다.


다만, 내가 아는  아빠는 헤이즐넛 시럽이 들어간 달달한 아아 좋아한다는 .


나는 아빠에게 살갑고 사랑스러운 딸은 앞으로도 못 될 거고,

그렇다고 잘나가서 "아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하는 딸도 못 될 거야.


그래도 열심히 살아서 아빠가 좋아하는 아아는 실컷 먹을 수 있게 해줄게,

600원 더 내고 헤이즐넛 시럽 추가한 아주 달달한 아아로.


그러니까 술 적당히 마시고 오래오래 살아서,

나중에  “인생은  말대로 100세부터 더라." 하고 말해줘.


미운만큼 사랑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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