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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Nov 29. 2023

[인문] 생각없이, 살던대로에서 벗어나기

로버트 루트번스타인·미셸 루트번스타인,《생각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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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걸까


스노우폭스 그룹 김승호 회장은 강연에서 "우리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것을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 살게 돼요."라고 말한다. 요즘은 새삼 이 말을 체감하게 되는 것 같다. 아파서 하루 종일 방에 누워있던 날, 나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유튜브를 켰다가 껐다가 하길 반복했다. 뭐 중요한 것도 아닌데, 괜히 정치 평론을 틀었다가, 인터넷 스트리머 방송을 틀었다가, 게임 방송을 틀었다가, 나중에는 철학 채널, 지식 채널을 넘어 수족관에서 키우는 곰치 밥 먹이는 영상까지 갔을 때 휴대폰을 내려놨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나는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고,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도피성으로, 또 재미있자고 유튜브로 도망치는 습관이 생겼다. 왜? 글쎄. 왜라고 묻지 않았다. 별 생각없이 그냥. 그냥. 그냥. 살다보니까 그냥 누군가가 깊게 생각하고, 상상한 아웃풋 속에서 살고 있었다. 콘텐츠 하나하나는 내게 이로움을 줄 지 몰라도 그것들로만 내 인생이 채워지니 심각한 공허함이 몰려왔다. 그제야 아무리 좋은 것들도 내겐 노이즈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생각의 탄생》은 박웅현의 《여덟 단어》 개정판을 읽다가 언급된 부분이 있어서 잡게 되었다. 생각 없이 살다보니, 내 의견이 없어졌고, 내 의견이 없어지니 세상에서 나의 의미를 찾기가 더더욱 어려워졌기에, '생각'이란 걸 좀 해보려고 이 책을 읽었다. 내가 놓치고 있던 많은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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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은 역사 속에서 뛰어난 창조성을 보인 사람들이 분야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활용한 13가지의 발상법을 수많은 예시와 함께 제시하는 책이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를 읽다가 저자가 이 책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을 보고 읽기 시작했다. 어떤 맥락에서 이 책을 썼는지는 이해하겠지만, 예시가 너무너무 많아서 스킵해가면서 읽기를 추천한다. 읽다가 지친다.

*책의 전체 내용을 다루지 않습니다. 임팩트를 준 부분만 추려서 쓰고, 제맘대로 내용을 편집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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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으로부터


책의 첫 장에는 아인슈타인, 아서 C. 클라크, 파인만 등 각 분야의 거장들이 경험했던 '직관'의 순간에 대해 말한다. 직관, 그러니까 판단이나 추론, 경험, 계산 등에 대해 전혀 의존하지 않고 사실을 파악하는 능력은 공식이나 기호에 선행한다고 한다. 살다가 불현듯 찾아오는 초논리적인 순간을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소설가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걸 받아적었을 뿐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플롯짜고 캐릭터짜고 기승전결이라는 내비게이션이 나와야 제대로 된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는가 싶지만, 이렇게 쓰인 작품들이 읽기에도 좋은 경우가 굉장히 많다. 타이핑하며 구성해놓지 않아도 완성체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수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일단 머릿속에 정답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공식들로 해답을 향해 나아가는 풀이를 완성해내는 역방향의 과정.

에이- 그런 건 천재들이나 하는거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의 목적은 그 편견을 깨부시고, 13가지 생각 도구를 통해 누구나 계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걸 믿고 활용하는가는 독자에게 달려있을 테다. 책에서 제시하는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 중 이 글에서는 관찰, 유추를 중심으로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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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현상의 가치를 재발견 하기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는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카메오로 출현한다.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하는 시 강의를 하면서 그는 사과를 하나 들고 나와서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은 이 사과를 본 적이 있나요?"
그는 덧붙인다. 백 번, 천 번, 수 만 번? 아니요. 여러분은 사과를 본 적 없어요. 라고.

한 번 내 손 안에 사과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손 안에 들어오는 사이즈, 새빨갛고, 단단하고, 달콤한 향이 나고, 깨물었을 때는 아삭하는 소리를 낸다.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사과를 생각해낼 수 있다. 그런데 왜 김용택 시인은 수강생들에게 사과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일까?

위 사진을 다시 보면서 생각해보자. 사과는 내 상상처럼 정말로 빨간색인가? 아니다. 빛의 반사에 따라 어느 부분은 노란색이고, 어느부분은 주황색이기도 하다. 정말로 동그란가? 사진에서는 동그랗지만 깎아 놓았을 때는 그 동그란 모습이 사라진다. 우리는 김용택 시인의 사과도, 위 사진의 사과도 자신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것이지, '그 사과'에 집중한 것이 아니란 의미다.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통해서 사람이나 사물의 사실적인 정보를 본다기 보다는 '개념'을 본다.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대니얼 카너만의 《생각에 관한 생각》의 용어를 빌려오면 시스템 1의 작용으로 그냥 자연스럽게 처리가 되는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사람은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듣는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듣는 귀가 있는자 들어라. 보는 눈이 있는자 보아라.'라고 말씀 하신 것도 그런 인간의 속성을 간파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미술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변기를 하나 갖다 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마르셀 뒤샹이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고 파이프 그림을 그렸던 르네 마그리트는 일상의 사물들에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다른 '가치'를 발견했다. 이는 한 사람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내 주변의 물건들을 관찰하고, 깊이 생각해서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을 발견해낸 케이스다. 요는 '그냥', '생각없이'를 걷어내고 관찰하는 것의 본질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한 결과로 창조와 창의가 따라온다는 말이다.

이는 또 다른 생각 도구 '추상화'와도 연결된다. 느낌적인 느낌, 뭘 말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념적인 모시깽이는 우리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매사에 무언가를 보고 그냥 좋네 별로네 하고 넘어간다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 모르겠어~ 하고 넘긴다면 인간의 인식 영역은 현저히 좁아지고 만다. 파블로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으라!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라!"

'나의 시선으로' 잘 들여다보는 것, 잘 듣는 것으로부터 직관도 창조도 발견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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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추: 유사성을 상상해 공백 메우기


잘 들여다보면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관찰도 생각의 도구가 되지만, 비어있는 공간을 채울 때도 창조의 길은 열린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는 '서사 오류'라는 개념으로 인간을 설명한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추상적이기보다 구체적이고, 운보다는 실력이나 어리석음에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이야기에 끌리며, 일어나지 않은 무수한 사건보다 일어난 몇 가지 눈에 띈 사건에 집중한다고 한다. 때문에 탈레브는 우리 인간은 과거를 설명하는 조잡한 이야기를 꾸며놓고, 그것을 진짜라 믿으며 자신을 끊임 없이 속인다고 말한다.

이를 달리 생각해보면 팩트에 기반한 논리적 사고보다는, 원하는 이야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논리를 '내가 보고 싶은대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속이는 상상을 만들고 그걸 진짜라 믿는다는 말이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이 '내가 보고 싶은대로' 구성하는 과정이다. 사람은 논리의 공백을 상상으로 메울 수 있다.

인간의 뇌는 꼭 보고 관찰한 것만 이해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양자역학이나 논리학, 민주주의나 선악 같은 실제론 지각할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도 배우고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유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분야의 개념들도 머릿속에 있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서 공통점이나 유사한 성질을 발견한다면 미루어 짐작하여 감각으로 상상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각과 청각이 작동하지 않는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님의 '물'에 대한 감각, 욕구, 느낌을 가르치는 교육으로부터 이 물건, 저 물건을 가지고 감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무수한 '개념'을 체득하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되었던 것처럼 유사성을 인식하는 능력은 우리를 다른 지평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때문에 아이들과 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방향의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 물질이 갖고 있는 가능성과 용도, 목적을 잘 모른다. 그렇기에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 될까'에 착안하여 생각하기에 전혀 새로운 방식의 의외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개념의 유사성을 떠올려 상상으로 모르는 것의 공백을 메우는 건 유추와 은유를 통해서 가능하다.

아이들처럼 보고, 상상하고, 놀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또다른 생각도구 '놀이'도 결국 우리 머리에 이미 굳어진 '목적'을 탈피하고 '그냥 저질러보는', '다르게 시도해보는' 과정 속에서 크레이티브가 나온다는 점에서 유추와 연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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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없이, 살던대로에서 벗어나기


관찰과 추상화, 유추와 놀이, 패턴화와 모형화. 《생각의 탄생》이 제시한 생각도구들은 개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서로 연결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동시에 사고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여러 상태로 존재하다가 관측되는 순간 하나의 가능성으로 확정이 되는 양자역학의 개념과 유사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도 현실화될 수 없다. 관측하지 않고 관성대로 사는데 무엇이 창조되겠는가. 그저 '살던대로'라는 값만 나올 뿐이다. 내가 알고리즘에 빠져 생각없이, 살던대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던 콘텐츠들은 나를 정해진 값으로 이끈다. 상상의 크기는 그 콘텐츠들이 상상한 범위에 한정되고, 본질보다는 표면의 정량적인 평가에 생각은 머문다. 천재가 아니니까, 나는 상상력이 부족하니까. 자책할 것 없다. 우리가 '보던 것만 보고, 생각을 멈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까.

늦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세상의 본질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타인의 상상력에,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를 잃어간다는 감각을 끊어낼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생각하고, 상상하고, 또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다보면 '나의 것'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의미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수많은 노이즈들 사이에서 '나'로 바로 설 수 있는 관점이 생긴다면 비로소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끌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자. 그리고 '그냥' 살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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