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나경 인터뷰 #13
정하경은 요즘 ‘학나경을 포함한 자기 자신’과 ‘학나경을 제외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로 명쾌하게 표현하자면,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그것이다. 학교, 나이, 경력 역시 자신을 설명하는 유의미한 부분이다. 그러나, 정하경은 매일을 살아갈수록 학나경과는 관련이 없는 사적 자아를 받아들이고, 몰랐던 점을 알아채가며 성장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김지연 처음부터 학나경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마웠다.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정하경 ‘리빙 라이브러리’라는 도서관을 다룬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외국에 있는 도서관인데, 책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도서관이다. 책 대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궁금한 사람과 대화를 하고, 인터뷰를 한다. 학나경 프로젝트를 보자마자 딱 그게 떠올랐다. 다만, 학나경은 조금 더 구체적인 컨셉이 있다고 해야 하나. 학교와 나이와 경력을 제외하고, 사적인 요소를 들여다본다. 전문 리서치와는 다르게, 추상적인 질문을 한다는 점이 재밌다. 질문이 추상적이어야만 인터뷰이의 관점에서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광범위한 답변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지연 학나경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의 장점이 있다면.
정하경 한 카페 사장님이 여시는 필사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필사하고 발표하는 거다. 정말 랜덤한 사람들이, 학교, 나이, 경력을 제외하고 책과 텍스트에 대한 자신의 감정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나의 지평이 넓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교, 나이, 경력보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이 더 재미있다. 학나경으로 사람을 볼 때보다, 더 매력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학나경은 어떤 기준을 넘어서면 좋고, 잘난 게 있는데, 생각과 감정은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보면, 그 사람이 잘나서 좋은 게 아니라 그 사람과 결이 맞아서 좋다.
김지연 공감한다. 학교, 나이, 경력과 같은 틀로 나를 가둬버리면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에 대해서 알기도 힘들다.
정하경 맞다. 어렸을 때는 내가 더 똑똑해지고, 잘하는 것이 많아지는 게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못하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그럼에도 잘 살아가는 게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못하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지 않고, 직면하면 괴롭기도 하지만. 내가 잘났다고 결과가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못났다고 해서 결과가 못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해가 갈수록 나에 대해 더욱 많이 알아가게 되는데, 대체로 학나경과는 관련이 없는 나의 변두리에 가깝다.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정하경은 성장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고 했다. 괴로움과 단점을 모두 극복하는 게 어른이 아니라, 괴로움과 단점을 안고 살면서도 때로는 의연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 그게 그가 지금 되어가고 있는 어른임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그가 되고 싶은 어른이기도 하다.
김지연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유형이 있다면. 또, 지금 본인은 어떤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가.
정하경 어른들은 진짜 못됐구나. 그런 생각을 요즘에 많이 한다. 그럼에도 나를 좋아해 주는 몇몇 어른이 있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최근에 회사에서 인사 평가를 하면서도 느꼈다. 그럼에도, 진짜 나를 믿어주고, 좋아해 주고, 못할 때도 눈감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손해 보지 않게끔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데, 그걸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를 깨달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도 이미 어른이긴 하지만, 조금 더 너그러운 어른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지금도 집에 “어른 있니?”라고 전화 오면 어른 없다고 한다. 내가 나의 사수를 좋아하는 이유도, 물론 능력 있고, 잘하고 그런 것도 존경스럽기는 한데, 자기가 자기 힘들 때 힘들다고 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밑에 있는 나도 힘들다고 다 참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다.
김지연 그래서 그렇게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롤 모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 롤 모델이 아니라.
정하경 비슷한 얘기로, ‘흑역사’라는 말을 싫어한다. 청소년기에 내가 쓴 드라마틱한 글들을 보면, 그때 나의 슬픔은 지금의 나에게는 별거 아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그걸 글로 써서 이겨내고 있고, 그때의 나를 지금 어른이 된 내가 존중해 주어야 한다.
김지연 나도 그렇다. 순간의 감정을 아무말로 풀어놓았더라도,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을 건데, 나중에 괜히 부끄럽다고 지우기가 싫다. 그때 고민을 해서 내놓은 결과물이 그거였겠지, 싶다.
정하경 그때의 나를 미워하면서,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일은 성립할 수 없다. 어린 나 덕분에 그래도 지금의 취향과 성격, 그리고 내 친구들이 아직까지 있다. 그때의 나는 힘든 것도 많았고,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면서 충실하게 살았다. 내가 좋아했던 것,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부끄러워하지는 않고 싶다.
김지연 매월 혼자 인생네컷을 찍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정하경 원래 기록하는 걸 좋아했다.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걸 좋아한다. 사물이나 풍경을 보면서 내가 꽂히는 부분을 남긴다. 팩트를 남기고 싶다기보다는, 내 감상을 남기고 싶다는 의미다. 예전에 유럽 여행 갔을 때, 정말 뜬금없이 길가에 놓인 유리잔이 있었다. 쓰레기가 아니라, 그냥 단정하게 거기 놓여 있었다. 잃어버린 느낌으로. 그래서 그런 (랜덤한) 순간을 모으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상황에 놓인 순간들을 나중에 모아봤을 때, 연관성이나 연속성을 찾아내는 게 재밌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으로는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월 찍는 날의 상황에 따라서 내가 달라지는 걸 보는 재미도 있다.
김지연 의식적으로 기록을 많이 남기려 하는 편인가.
정하경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매해 일기를 썼다. 부산사람들은 알건데, 그때는 충효일기장을 써야 했다. 하여튼, 그때부터 쓰던 일기장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필사도 항상 해왔다.
김지연 특별히 마음에 가는 구절을 적는 기준이 있는가.
정하경 한눈에 와닿는 구절이 있다. 언어가 가진 힘을 특히 강하게 느낀다. 영화를 볼 때도 대사 위주, 노래를 들을 때도 가사 위주로 감상한다. 모두가 다 겪을 법한 감정을 상투적으로 풀어내지 않는 구절이 좋다. 모호한 감정이라서 텍스트로 못 담아낼 법한 것들을 텍스트로 포착하고 담아내는 게 좋다. 글로 명료하게 나타나면 좋다. 그래서 나는 말이 좋다. 내가 말하는 것도 좋아하고, 듣는 것도 좋아하고. 나는 정말 현실적인 것, 돈 버는 것 외의 일을 생각하라고 하면 작가가 되고 싶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쓰고 싶다.
김지연 스스로를 학나경 외적인 요소로 소개하자면. 수식어도 좋고, 키워드도 좋다.
정하경 내가 되고 싶은 인간상은, 궁극적으로 ‘용기 있게 끝까지 내가 먼저’ 하는 사람이다. 회복탄력성을 갖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회복탄력성이란,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생긴다. 용기를 가지고,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다. 나는 겁도 많고 걱정도 많지만, 이것들을 안고 살아갈 방법을 찾고자 한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나는 내가 나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짤 중에, “다 울었니? 그럼 이제 할 일을 하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결국은 그게 내가 회복탄력성을 회복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럼에도’ 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럼에도’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모순적인 반전이 좋다. 나의 하루에 아무리 괴로움이 많고, 싫은 것이 많더라도, ‘그럼에도’ 사소한 계기가 또 다음 날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최악의 수를 상상하면서도, ‘그럼에도’ 당장 오늘을 살아가고, 사랑할 이유를 찾고, 당장 눈 앞에 놓인 것에 집중하려 하는 사람이 좋다. 정하경은 그럼에도 살아간다.
작성자 김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