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단길 이야기-32
#108 파란빛 이즈미르
이즈미르에 도착한 건 아침 8시. 9월이지만 아직은 아침부터 더웠다. 터미널에서 세르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배가 고파 호스텔에 가기 전 수프를 한 그릇 사 먹었다. 차까지 한 잔 마시고 호스텔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시장이 열려서 시장 구경도 좀 하고, 골목 구석에 있는 호스텔을 찾아냈다.
호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막 아침식사 시간이었다. 음식을 권하는 주인아저씨의 호의에 나도 같이 껴서 두 번째 아침을 먹었다. 예약할 때는 몰랐는데, 이 곳은 비건 호스텔이었다. 그래서 아침 메뉴도 다 채식 식단이었다. 터키에서 마주한 채식 식단은 산사 앞에서 먹는 돈까스만큼이나 낯설었다.
터키는 술이 비싼 대신 스타벅스가 싸다. 우리나라의 절반 정도 가격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비싸서 잘 못 가는데, 여기선 오히려 자주 가게 된다. 오래 앉아있어도 되고, 와이파이도 잘 터지기 때문에. 푸른빛 에게해를 끼고 난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스타벅스가 보이길래 들어갔다. 한국인의 음료인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한 잔 시키고 바다가 보이는 3층에 올라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즈미르에 왔으니 이 도시에서 할 일을 찾아봐야지. 비로소 인터넷을 켜고 구글과 트립어드바이저에 '이즈미르'를 검색했다.
박물관은 특별히 보고 싶은 전시물이 없으면 잘 안 가는 편이지만, 트립어드바이저는 내가 앉아있는 스타벅스 바로 옆 골목에 있다는 아타튀르크 박물관을 추천해줬다. 한 번 믿어볼까, 카페를 나와 입장료가 공짜라는 그 박물관을 찾았다.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케말 아타튀르크의 생애와 그가 생전 쓰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전시물은 별로 볼만한 게 없어서 옛날 사진들만 죽 둘러보고 나왔다. 다른 관람객들도 마찬가지로 장황하게 나열된 설명에 비해 대충 훑어보는 듯했다. 설명이 너무 빼곡해서 오히려 읽기가 힘들다. 혹은 공짜라는 입장료 때문에 '뭔가를 봐야겠다'는 사람들보다 부담감 없이 에어컨 바람을 쐬러 들어왔다 나가는 관람객들이 훨씬 많아서 그럴 수도.
파란색 간판이 마음에 드는 카페에 잠깐 앉아 터키쉬 커피와 보드카, 레드불을 주문했다. 적당한 알코올과 카페인에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으로 길거리를 걷다 저녁까지 먹고 호스텔로 돌아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집 앞에서 산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었다. '오렌지 주스 어디서 샀냐'라고. 뻔한 대화지만 호스텔에서 한 번 대화가 시작되면 항상 다른 사람들이 끼고 껴서 다들 친구가 된다. 그렇게 미국인 제이미와 우루과이에서 온 마이크를 만났다. 다들 혼자 여행하는 친구들이라 내일 이즈미르를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에어컨이 없는 호스텔의 단점은 밤에 필연적으로 창문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점. 이 말인 즉 모기들이 바깥과 방 안을 자유롭게 왕래한다는 뜻이다. 가려움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막 선잠이 들 때쯤 앵앵대는 소리에 잠이 깰 때만큼 짜증 나는 게 없다. 하지만 아침 식사가 포함된 저렴한 가격의 호스텔이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109 비건... 뭐라고?
오후 늦게 어제 만난 제이미, 마이크와 함께 호스텔에서 자전거를 빌려 거리로 나왔다. 이즈미르는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고, 미항(美港)으로 이름나 있지만 막상 시내는 여느 대도시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해안을 따라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 도시의 랜드마크인 시계탑이 있는 코낙 광장으로 향했다.
이즈미르는 터키 공화국의 건국이념인, 정교분리와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케말리즘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도시다. 터키 친구들도 이즈미르가 가장 탈오스만, 진보적인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도시 곳곳에 아타튀르크의 사진이 붙어있고, 코낙 광장에는 거대한 현수막에 인쇄된 그의 사진이 건물 한 면을 뒤덮고 있었다. 물론 집권당인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 또한 그 인기를 의식해서인지 맞은편 건물에 케말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았다. 터키 공화국의 건국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와 그를 마치 같은 반열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2달 전 치러진 터키 대선에서도 여전히 에르도안의 인기는 이곳 이즈미르에서는 바닥이었다고 한다.
반나절의 자전거 라이딩이 끝나고 마이크가 우리를 불러 모았다.
"내가 진짜 괜찮다는 비건 레스토랑을 알아놨거든, 너희도 같이 가볼래?"
비건 호스텔의 투숙객답게 그는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채식주의자가 아닌 제이미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하곤 그를 따라갔다. 자전거를 세우러 들른 호스텔에서 두 명의 폴란드인이 합류했고 우리는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가 제일 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비건 케밥, 비건 버거, 비건 피자와 같이 익숙한 음식 이름 앞에 '비건(Vegan)'이라는 완고한 단어가 붙어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비건 치즈 버거를 주문했다. 비건은 육류뿐 아니라 유제품과 난류도 먹지 않는 철저한 채식주의기 때문에 비건 치즈 버거는 무슨 맛일까 궁금했다. 접시에 담겨 나온 햄버거의 모습은 내가 아는 수제 버거의 비주얼과 똑같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패티가, 다름 아닌 콩고기 맛이었다. 어릴 때 내가 싫어했던 반찬 중 하나인 콩햄, 콩소시지. 인공적인 맛은 둘째 치더라도 입안에서 파사삭 바스러지는 식감이 식욕을 떨어뜨리곤 했다. 마이크는 비건 식당에서 고기는 콩단백이나 글루텐으로 만든다며 설명을 해줬다. '나는 한 입 먹고 진작에 콩고기인 줄 알았지' 햄버거를 우물거리며 혼자 생각했다.
가게의 점원은 머리를 짧게 깎은 여자 직원이었는데, 새로 합류한 폴란드인 루카스가 그녀에게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을 건넸다.
"혹시 남자예요, 여자예요?"
그녀는 당황한 듯 웃으며 그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제이미가 도끼눈을 하고 그를 몰아세웠다.
"루카스, 너 방금 되게 무례했던 거 알아?"
"왜 그게 무례한 거야, 저 사람도 아마 남자처럼 보이고 싶어서 머리도 짧게 깎고 옷도 보이쉬하게 입고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한 번 물어봐준 것뿐이야."
제이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미와 루카스는 계속 그 이야기로 얘기를 주고받다 끝내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저녁을 먹고 바닷가에 재즈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다들 눈치를 보다 말없이 호스텔로 돌아왔다. 내일은 다 같이 체시메라는 근교의 해수욕장에 수영을 하러 가기로 했는데, 그전까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옥상에서 제이미의 얘기를 한동안 들어줘야 했다.
#110 친환경 꼰대 마이크
"헤이 브로, 수영하러 안 갈 거야? 이제 그만 일어나."
마이크가 평소처럼 늦잠을 자는 나를 깨웠다.
"어, 가야지. 근데 다들 가는 거 맞아? 제이미랑 루카스도?"
"별 일 아니야. 어제 자기 전에 둘이 화해하더라. 서로 미안하다면서 하하"
다행이군, 옷을 주워 입고 준비를 시작했다. 내 윗 침대를 쓰는 독일인 슈테판까지 껴서 제이미, 마이크, 루카스, 다비드, 나 이렇게 6명이서 바닷가 마을인 체시메로 출발했다.
9월이지만 날씨는 30도를 훌쩍 넘겼고, 해수욕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우리는 선베드를 빌리고 옷을 던져놓은 뒤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곳의 바닷가는 가슴 높이의 얕은 바다가 넓게 이어져서 좋았다. 발이 안 닿는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면 해변에서 꽤 멀리 나가야 한다. '나 수영 못하는데' 이 한마디에 다들 나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싶어 해서 힘들었다. 개헤엄이라도 나는 괜찮은데.
올여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바닷가가 아쉬워 물에 들어갔다, 쉬었다를 반복하며 지칠 때까지 수영을 했다. 바닷물이 유난히 짰다. 지중해 물이 원래 염도가 높은데, 대서양과 멀리 떨어진 동지중해라 그런지 더 짠 것 같았다. 짠물을 너무 많이 들이켜 코가 따가웠다. 오후 늦게 우리 모두 물에서 나왔고, 선베드에 누워 몸을 말렸다. 다시 이즈미르로 돌아갈 길이 까마득했다. 수영이 칼로리를 많이 태우는 운동이라던데, 맞는 말인 것 같다. 몸이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처럼 무겁다.
"근데 해변이 너무 더럽지 않아? 사람들이 쓰레기를 너무 막 버리는 것 같아. 우리도 여기서 시간을 보냈으니까 조금이라도 치우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환경지킴이 마이크의 제안에 우리는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해수욕장에서 쓰레기를 주웠다.
마이크는 어제 비건 레스토랑에서도 알아봤지만, 지구를 끔찍하게 아끼는 친구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에어컨을 왜 이렇게 추울 정도로 트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에어컨을 18도로 트는 사람들은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흉을 봤다. 이어서 여름엔 좀 덥고 겨울엔 좀 추운 게 건강에 좋다며 쯧쯧 혀를 찼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전공 시간에 배운 이규보의 '괴토실설(壞土室說)'이 떠올랐다.
10월 초하루에 이자(李子)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아들들이 땅을 파서 움막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양이 무덤 같았다. 이자는 아무것도 모른 체하고 말했다.
"어인 일로 집에 무덤을 짓느냐?"
"이건 무덤이 아니고 움집입니다."
"움집은 무얼 하려고?"
"겨울에 화초나 채소를 갈무리하기에 좋고 또 길쌈을 하는 부녀자들이 비록 혹독하게 추운 때라도 이곳에서는 봄 날씨같이 따뜻해서 손이 얼어 터지지 않으니 참 좋습니다."
이자가 더욱 노해서 말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사계절의 한결같은 이치이다. 만일 이에 반하면 괴이한 일이 된다. 옛 성인이 만든 제도는 추우면 갖옷을 입고 더우면 베옷을 입도록 마련하였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또다시 움집을 만들어서 추위를 더위로 돌린다면 이는 하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사람은 뱀이나 두꺼비가 아닌데 겨울에 굴에 엎드려 지낸다는 것은 이보다 상서롭지 않은 것이 없다. 길쌈은 제 때가 있는데 하필 겨울에 하느냐? 또 봄에 꽃이 피고 겨울에 시드는 것은 초목의 한결같은 성질인데 만일 이에 반한다면 또한 철을 어긴 물건이다. 철을 어긴 물건을 길러서 때에 맞지 않게 즐긴다면 이는 하늘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이는 모두 내 뜻에 맞지 않다. 너희가 빨리 헐어버리지 않는다면 내 너희를 용서하지 않고 때리겠다."
아들들이 두려워서 얼른 헐어버렸다. 그 재목으로 땔감에 쓴 뒤에야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_이규보, 괴토실설 (본문 출처 나무위키)
#111 무더웠던 2006년 여름
이즈미르에서 조금 떨어진 셀축으로 가는 기차 안. 역시 이즈미르 호스텔 멤버들과 함께다. 고대 도시인 에페소스를 보러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차를 잘못 탄 건지 기차가 갑자기 멈췄다. 지도상으로는 아직 멀었는데, 아무도 우리에게 어디로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야 그냥 일단 내리자. 가만히 있으면 뭐해, 내려서 차라도 잡아타야지."
폴란드에서 터키까지 히치하이킹으로만 여행했다는 폴란드 듀오 루카스와 다비드가 우리를 이끌었다. 4명은 한 번에 히치하이킹을 하기에는 많은 인원이다. 나와 제이미, 루카스와 다비드 2개 조로 나눠 각자 차를 잡아타고, 2시간 뒤 에페소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장소를 잘못 골랐는지 히치하이킹은 쉽지 않았다.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우리를 무시하고 차들은 쌩쌩 달려갈 뿐. 그렇게 20분가량을 도로에서 보내는데, 셀축으로 가는 미니버스가 우리 앞에 멈췄다. 제이미와 나는 갑자기 찾아와 준 행운에 감사하며 히치하이킹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버스에 올랐다.
"혹시 폴란드애들이 먼저 도착해서 들어가 있는 거 아니야?"
제이미의 말을 따라 티켓을 끊고 에페소스 유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곳은 고대 도시가 잘 보존된 지역인데, 12년 전 초등학생 때 가족들과 왔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남은 기억은 더운 날씨와 흘러내리던 아이스크림, 액정이 고장 난 디지털카메라 정도.
유명 유적지답게 관광객들이 여전히 많았다. 가이드가 든 깃발을 줄지어 따라가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 효도 관광 온 미국인 노부부, 손선풍기를 들고 다니는 한국인 커플, 항상 대가족으로 여행하는 아랍인들까지. 에페소스는 고대 도시의 골목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그런지 옛날 모습이 어땠을지 그려보기가 쉽다. 저 많은 사람들이 다들 튜닉을 입고 걸어 다니는 상상을 했다.
도시를 한 바퀴 다 둘러볼 때까지 루카스와 다비드는 만나지 못했다. 히치하이킹으로 어디 딴 곳으로 새버린 걸까, 제이미와도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그녀는 이즈미르로 돌아가고, 나는 해변가 휴양 도시인 쿠샤다시로 향하는 돌무쉬를 탔다.
이스탄불로 돌아가기 전 하룻밤을 쿠샤다시에서 쉬었다.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침대와 옷장, 의자와 책상 하나만 있는 허름하지만 깔끔한 곳이었다. 방에서 나무 냄새가 났다. 에어컨이 없어서 창문을 열어두었다. 발코니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해변으로 난 길을 따라 늦깎이 피서객들이 지나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