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여행이란_코자엘리, 터키

나의 비단길 이야기-31

by 현진

#104 시골 찻집 골든벨


20180830_082308_HDR.jpg


작업 시작 1시간 전인 7시에 미리 일어나 화장실을 먼저 다녀온다. 그리고 식료품 창고에서 비스킷을 꺼내고 막 토스트를 굽고 있는 마누엘에게 '내 거도!'라고 부탁한 뒤 커피포트로 물을 끓여 진한 커피를 타는 일.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일을 익숙하게 하나하나 처리한 뒤 작업복을 입고 농장 문 앞에서 부락을 기다린다. 저 멀리서 부락이 외발 수레에 쟁기를 싣고 왔다. 오늘은 김매는 날이겠구나, 다들 쟁기를 하나씩 집어 들고 콩밭으로 향했다. 일루아가 오늘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챙겨 와 노래를 틀어줬다. 하지만 허리가 아픈 건 똑같다. 잔가시가 잔뜩 난 호박보다는 콩이 낫긴 하지만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20180830_120517.jpg 벌레 발견


우리들과 같이 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은 벌써 한 고랑을 끝내고 저만치 앞서 나가고, 우리는 노래만 흥겹게 틀어놨을 뿐 작업 속도는 자꾸 쳐졌다. 50분 일하고 10분 쉬기로 했던 우리의 스케줄은 어느새 40분 일하고 20분 쉬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한번 앉으면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다.

000010.JPG
000041.JPG 피나와 무라드 아저씨


작업이 끝나는 1시가 되자마자 우리는 쟁기를 씻어두고 숙소로 향했다. 내 몸은 나트륨과 당을 동시에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자마자 토마토를 썰어 설탕을 잔뜩 뿌려먹었다. 찬 물까지 마시고 나니 조금 살 것 같다.

"나는 샤워 제일 마지막에 할게! 먼저 씻어."

유난히 힘들었던 오늘 씻기도 귀찮아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20180823_154328.jpg
20180830_135306.jpg


내 차례가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점심을 해 먹었다. 오믈렛과 치즈, 요리는 내가 했으니 설거지는 만만한 마누엘에게 미루고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자고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소파에는 피나와 일루아가 앉아있다. 우리는 모두 이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쓸지 몰라 고민 중이다. 그들은 농장 문 앞에 주차된 무라드 아저씨의 소형차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저 차 타고 드라이브나 가볼까?"

일루아가 제안을 해왔다.

"차 키는 어딨는지 알아?"

"무라드는 맨날 차 키를 꽂아둬. 어제도 자른 나무판자를 저 차로 옮겼는 걸."

곧바로 지미를 부르고 자고 있는 마누엘을 깨웠다. 오늘 하루 일을 도와주러 왔다는 부락의 친구까지 무라드의 차에 태웠다. 물론 무라드 아저씨의 허락은 받지 않았다. 조그만 자동차에는 자리가 없어서 가위바위보에서 진 내가 트렁크에 탔다. 하지만 트렁크는 꽤 안락했다.


20180829_181532.jpg 트렁크에 갇힘


우리는 신나게 차를 몰고 나가다 비닐하우스 옆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무라드 아저씨에게 걸렸다. 그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슈퍼마켓!' 하는 우리의 외침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줬다. 라디오를 틀어 쿵쿵 울리는 터키 음악 방송을 들으며 우리는 제일 가까운 슈퍼가 있는 주유소로 차를 몰았다. 그곳은 찻집도 겸하고 있는 곳이었다. 정자에 앉아 차이 6잔을 주문하고 이미 앉아계신 동네 아저씨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정자 중앙의 작은 분수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걸 구경하며 앉아있었다.


IMG-20180904-WA0000.jpg


"아시아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야?"

일루아가 내게 갑자기 물어왔다.

"내가 파리에서 공부할 때 다른 여행객들을 보고 든 생각인데, 아시아 사람들은 특정 장소에만 몰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물론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파리지만, 어떤 곳에는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등 아시아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지만, 그들을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곳도 있지.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아시아인들에게 여행이란 자동차나 집처럼 또 하나의 자기 과시의 수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 그들은 항상 예쁘고, 멋있게 차려입고 있는 것 같거든. 아마 남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기 위해서겠지. 사진만 찰칵찰칵 찍고 떠나는 많은 관광객들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여행과 그들의 여행에는 조금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조금 듣기 거북하기도 했지만 그가 나쁜 의도로 말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건 단지 개인의 성향 차이인 것 같아. 한국으로 놀러 오는 여행객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던데. 여행지에서 새로운 장소에 가서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고,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은 건 다 똑같은 거 아닐까?"

이런 식으로 한동안 여행의 방법에 대한 대화가 오고 갔다. 사람들의 성격과 가치관만큼이나 수많은 생김새의 여행이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이 좋고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의 여행에 대해서도 스스로 물어봤다.

'처음 생각한 여행과 같은 맥락의 여행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근처에 앉아계시던 아저씨들이 우리가 마신 차이까지 계산을 해주셨다. 일어나 찻값을 치르려 하자 슈퍼 아저씨가 이미 다 계산된 거라며 손사래를 쳤다. 터키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저씨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농장으로 다시 차를 돌렸다.


#105 헤이즐넛 줍기


트럭의 화물칸에 몸을 싣고 콩밭으로 향했다. 지긋지긋한 콩을 따며 오늘도 작업 종료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부락이 2시간 먼저 우리를 불러 모았다.

"콩밭은 이만하면 됐고, 오늘은 헤이즐넛 숲에 가서 헤이즐넛을 줍자."

그는 농장으로 가는 길에 있던 헤이즐넛 숲에 우리를 내려주고 마대 자루를 하나씩 쥐어줬다. 우리는 헤이즐넛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는 헤이즐넛을 주워 담았다. 꽤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잠깐 쉬면서 막 딴 헤이즐넛을 까먹었다. 생콩 같은 비린내가 나서 바로 뱉어냈다. 우리가 평소에 식료품 창고에서 꺼내 까먹던 건 바짝 말린 것이었다.


IMG-20180902-WA0005.jpg 헤이즐넛 자루 속 카흐벳


헤이즐넛 자루를 가득 채우고 뿌듯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으로는 계란말이를 했다. 숙소의 가스레인지는 가스 밸브를 열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야 하는 옛날 물건이다. 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불을 붙이려다 손을 태워먹을 뻔한 적이 있어서 항상 마누엘에게 불을 켜달라고 부탁한다.


요리 영화는 아니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계란말이에 꽂혀서 한동안 예쁘게 계란말이를 만드는 법을 열심히 찾아봤다. 한창 잘 만들 때는 나름 예쁘게 말았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하려니 모양이 잘 안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옆에서는 마누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데... 뭉개진 계란말이를 원래 이런 모양인 척하고 대충 잘라줬다.


농장에서는 닭과 오리, 양을 풀어서 키운다. 하지만 해질녘이 되면 다시 동물들을 몰아서 우리로 넣어야 한다. 이것도 우리의 일과 중 하나였는데, 닭을 닭장으로 넣는 일이 가장 어렵다. 양이나 오리는 무리를 따라 우르르 따라가는데 비해 닭은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 농장 전체에 드문드문 퍼져 모이를 쪼는 닭들을 일일이 찾아다니기도 힘들고, 내가 모는 방향으로 잘 따라주지도 않는 자유로운 친구들이라 부락도 이때까지 한 번도 모든 닭을 닭장에 집어넣은 적이 없다고 말해줬다.


20180827_181934_HDR.jpg


오늘은 나와 일루아가 닭을 몰 차례였는데, 오전에 딴 콩을 조금 뿌려 닭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은 다음 닭장으로 모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끝까지 도망 다니던 한 놈은 나와 마누엘이 길을 막고, 일루아가 쫓아가 날갯죽지를 붙잡고 닭장에 던져 넣었다. 닭은 펄쩍 뛰며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 저녁을 차려놨겠지? 뿌듯하게 하루 일과를 마쳤다.


#106 북극성과 은하수


농장에 온 지 두 번째 금요일인 오늘, 일하는 마지막 날이다. 토요일에 시내에서 열리는 시장에 내다 팔 작물들을 집중적으로 수확했다. 가지, 토마토, 콩, 로즈마리, 라벤더. 보랏빛 라벤더를 따서 다발로 묶어두는 작업까지 끝마치자 손에 향긋한 라벤더 향이 스몄다.


20180827_134901.jpg 로즈마리 다듬기


일을 끝내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농장 초입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먹었다. 비교적 낮은 곳에 있는 사과는 우리가 다 따서 이제 지미가 꽤 높이 올라가서 사과를 던져줬다. 마지막 퇴근길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우리 다 주말에 떠나잖아, 오늘 밤이 마지막일 텐데 캠프파이어 어때?"

내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농장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준비를 시작했다. 마누엘은 멕시코 요리를 위해 살사 소스를 만들고, 피나와 지미는 땔감을 모았다. 나와 일루아는 장을 보러 일루아의 지프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우리의 큰누나인 피나가 적어준 쇼핑 목록을 보고 고기, 과자, 마쉬멜로와 맥주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는 헤이즐넛 숲에 살짝 들어가 고기와 마쉬멜로를 꽂을 가지를 꺾었다.


20180831_200046.jpg
20180831_201855.jpg


농장에 도착하니 이미 피나는 살구 파이를 굽고 있고, 마누엘은 살사 소스를 완성해두었다. 지미가 모아둔 장작을 쌓고 불이 붙은 신문지를 던져 넣었다. 바싹 마른 장작에는 불이 잘 스며들었다. 나는 동물들 먹이 주는 걸 좋아하는데, 불을 돌보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내가 넣은 장작을 벌건 불꽃이 날름 삼키며 사그라뜨리는 걸 보는 게 재미있다. 내가 불을 키웠다 줄였다 하며 놀 동안 일루아는 석쇠에 구울 고기를 준비해서 왔다. 그는 마트에서 사 온 닭다리와 소고기를 구웠다. 기름이 불 위로 뚝뚝 떨어졌다.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찬물에 담가 뒀던 맥주를 꺼내 마셨다. 터키는 다른 물가에 비해 술이 비싼 편이다. 터키에 오고부터 술을 잘 안 마셨는데, 오늘은 특별히 인당 세 캔씩을 준비했다. 곧이어 고기가 구워지고, 고기에 마누엘의 살사 소스를 곁들여 먹었다. 그는 할라피뇨가 없어서 제대로 맵게 못 만들었다며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에게 첫 번째 멕시코인이 만든 살사 소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20180831_214340.jpg


식사를 마치고 다들 불가에 모였다. 헤이즐넛 가지에 마쉬멜로를 꽂아 구워 먹었다. 모닥불 곁에 앉으면 무슨 이야기든 술술 풀고 싶은 마법에 걸린다. 다들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맥주를 다 마시고 마쉬멜로와 나초도 바닥났지만 우리는 불가에 남아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걸 구경하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얘기를 나눴다.


000004.JPG


시골이라 원래 별이 잘 보이지만, 일루아가 불을 끄면 더 많이 보일 거라며 숙소 근처의 모든 불을 껐다. 그리고 그는 차에서 붉은색 암등을 가지고 왔다. 그 등만 켜 두고 우리는 마당에 누워 한동안 까만 하늘을 응시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자, 나는 하늘에 훨씬 많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은하수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떤 별이 북극성일까 문외한들끼리 토론을 하며 남은 밤을 보냈다.


#107 농장을 떠나며


어젯밤 불을 피웠던 자리에는 타다 남은 장작 속에 불씨가 남아 있었다. 여전히 벌건 잉걸불에 물을 부었다. 푸쉬식 소리와 함께 재가 날렸다. 펼쳐뒀던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했다. 지미와 마누엘은 내일 떠나고, 피나와 일루아가 오늘 오후에 이스탄불로 돌아가는데, 나를 시내의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20180901_125532.jpg
20180901_155336.jpg


짐 정리를 마치고 2주 동안 지냈던 농장을 천천히 돌아봤다. 도착한 첫날밤에는 모기와 벌레, 조금 지저분한 화장실 때문에 바로 도망치고도 싶었는데 또 지내다 보니 괜찮아진 것 같다. 같이 지냈던 사람들도 다 좋았고, 특히 마누엘과 장난도 많이 치며 친하게 지냈는데 헤어질 때가 되니 아쉬웠다. 같이 낮잠을 자던 농장 고양이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아기 고양이들이 눈에 밟혔다. 닭들은 내가 가면 아쉬울 거다. 내가 맨날 창고에서 그날 딴 콩이나 옥수수 같은 것을 몰래 뿌려줬기 때문에 그동안의 소소한 행복도 끝일 테니까.


20180901_162712.jpg 차만 타면 자는 카흐벳


부락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일루아의 지프에 올라 터미널로 향했다. 서부 해안 도시인 이즈미르로 가는 야간 버스표를 샀다. 버스를 기다리며 읽다 만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을 계속해서 읽었다. 그리고 출발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올랐다.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을 보며 농장에서 보낸 2주가 꽤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색다른 경험과 여행 경비를 조금 아껴보려는 심산으로 이곳에 왔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이 받아가는 기분이다. 등받이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불안하고 신기한 듯 가끔 나에게 곁눈질을 해가며 항구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버지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고, 크레타에 정착하지 않고 어째서 이리저리 방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보아하니 할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야." 부둣가에 다다르자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외할아버지 말고, 해적이었던 우리 아버지 말이다."

잠깐 침묵을 지키고 나서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배들을 쳐부수고,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재산을 모았지. 넌 뭐야! 넌 무슨 배를 쳐부술 생각이냐?"

우리들은 항구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쥐었다.

"잘 가거라, 몸조심하고.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 외아들에게 전혀 만족하지 못한 아버지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렇다. 나는 무슨 배를 쳐부술 생각이었나?_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中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