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단길 이야기-30
#101 이스탄불로의 귀경행렬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콩 수확을 끝냈다. 한 사람당 한 고랑을 맡았을 뿐인데 두세 박스씩을 가득가득 콩으로 채웠다. 우리는 콩을 부락의 픽업트럭에 실어다 두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먼저 출발하기로 한 나, 지미, 마누엘은 순서를 정해 샤워를 빠르게 해치우고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뒤 버스가 다니는 옆 마을로 갔다. 미리 부락에게 물어 정해진 로컬 버스 시간에 맞춰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가 안 온다. 간이 버스 정류장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아주머니도 한 시간이 지나자 참을성이 바닥났는지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곧 승용차 한 대가 정류장 앞으로 왔고, 인상 좋은 아주머니께서는 우리에게 같이 갈 것을 권하셨다.
낡은 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버스 터미널에서 우리는 이스탄불로 가는 가장 빠른 버스표를 샀다. 하지만 오늘은 바이람 연휴의 마지막 날, 즉 이스탄불로 귀경 행렬 시작되는 날이었다. 교통체증 때문인지 우리가 탈 버스도 출발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을 훌쩍 넘겨 플랫폼에 도착했다. 이스탄불로 가는 도로 또한 지독한 교통 체증으로 이미 꽉 막혀있었다.
"오늘 밤에 이스탄불에서 펍은 못 가겠는데?"
"지하철이나 끊기기 전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이미 체념한 우리는 맥주니 야경이니 어젯밤 신나게 새웠던 계획들을 순순히 포기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대뿐.
이스탄불에 도착한 것은 지하철 막차 시간 즈음, 기나긴 여행에 지친 우리는 겨우 막차를 잡아타고 호스텔로 향했다. 3시간이면 넉넉하게 올 거리를 9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진짜 피곤해서 죽을 거 같아."
침대의 커버를 씌우며 농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윗 침대를 배정받은 마누엘에게 밤 인사를 건넸다.
#102 허벅지와 맞바꾼 경치
이스탄불을 둘로 나누는 보스포루스 해협. 해협을 따라 내려가면 좁은 내해인 마르마라 해가 나온다. 이 마르마라 해에는 '프린스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섬들이 있다. 오스만 제국 시절, 술탄이 되지 못한 왕자들은 왕권의 안정을 위해 이스탄불에서 떨어진 이곳으로 귀양 보내졌고, 제국의 수도에서 가깝지만 먼 이 섬들은 프린스 아일랜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카바타쉬 부두에서 프린스 아일랜드로 가는 배는 1시간마다 출항한다. 누르까지 우리 무리에 합류해 다 같이 배를 탔다. 배는 근교 여행을 떠나는 이스탄불 시민들로 가득했다. 자리가 없어서 갑판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갑판에서는 식칼을 파는 행상인이 토마토, 오이, 당근, 심지어 멜론과 호박까지 껍질을 삭삭 깎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마쌀라, 마쌀라!" (맙소사)
그는 껍질을 깎으며 스스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쇼는 재밌었지만, 누가 휴가 길에 칼을 살까 싶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꽤 많은 사람들이 쇼가 끝난 뒤 칼을 샀다. 칼 파는 아저씨는 뿌듯하게 웃었다.
우리는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헤이벨리카다에 내렸다. 선착장 근처에서부터 하얗게 칠한 테이블을 길가에 펼쳐놓은 카페들이 늘어서 있어 휴양지 분위기가 물씬 났다. 자동차가 없는 섬이라 여기저기 자전거 대여점이 보였다. 우리도 자전거를 빌렸다. 섬에는 오르막 내리막이 많았지만 페달을 계속해서 밟았다.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자전거 기어도 말을 잘 안 들어서 애를 먹었다.
해안 절벽을 따라 난 길은 전망이 좋았다. 작은 만에 통통배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걸 보고 자전거를 세웠다. 섬에는 고양이가 많아서 좋았다. 귀여운 고양이들이 이정표처럼 도로 중간중간에 앉아있다. 일일이 사진을 찍어주느라 자주 쉬었다. 내 가방에는 고양이가 좋아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쉬웠다. 사진이 찍힌 고양이들은 잠깐 내게 관심을 보이다가 이내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걸 알고는 떠나버렸다.
한눈을 팔며 섬을 한 바퀴 도는 데는 3시간 남짓 걸렸다.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숙소가 있는 가장 큰 섬인 뷔위카다로 가는 배를 기다렸다. 섬마다 다른 점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분위기는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해가 저물고, 해변에서 구운 옥수수를 사 먹었다. 노점에서 옥수수를 주문하면 고운 소금과 빨간 양념을 솔솔 뿌려주는데, 고전적인 맥주 안주 맛이다.
"내일은 나 누르네 집에서 하루 신세 질 것 같은데, 월요일 아침에 부락이 버스 터미널에서 기다린다고 했었나?"
"응 아마 그럴걸? 나도 내일은 이스탄불 구경이나 하려고. 모레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면 될 거야."
마누엘은 옥수수를 흘리지 않고 먹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103 조커는 참아줄래요?
지미와 마누엘을 다시 만나 코자엘리행 버스를 탔다. 우리 모두 너무 신나게 놀았는지 다시 농장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가기 전에 한인 마트에 들러 친구들에게 끓여줄 라면과 소주를 사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터미널 슈퍼에서 커피와 과자, 맥주만 챙겼다. 올 때와 달리 버스는 나는 듯 달려 2시간 만에 우리를 코자엘리에 내려주었고, 부락이 다시 우리를 맞아주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후 작업, 하루 일찍 돌아온 피나와 일루아는 막 오전 작업을 마치고 쉬고 있었다. 부러운 눈으로 그 커플을 바라봤다.
"그래도 오늘 작업은 재밌어. 헛간을 고치는 일인데 오후에도 부락을 도와주기로 했거든. 조금 쉬다가 같이 나가자."
평소 취미가 목공이라는 일루아는 전기톱과 그라인더 같은 위험해 보이는 공구들을 척척 만졌다. 시끄러운 소리와 날리는 톱밥에 나는 멀찍이 떨어져 판자만 옮겼다.
일루아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나무로 이것저것 만드는 게 취미였는데, 하루는 자기 친구 손가락이 그라인더에 잘리는 것도 봤다며 겁을 줬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바로 주워 들고 병원으로 뛰어갔지. 다행히 잘 붙어서 지금은 멀쩡히 잘 달고 다니고 있지 하하"
숙련공인 일루아 덕분에 작업은 속도가 났고, 부락은 미소를 지었다.
"헛간 나무가 다 썩어서 혼자 고치기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는데, 너희들이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피나가 요리해준 양고기를 먹고 우리는 다시 항상 그랬듯 식탁에 둘러앉았다.
"자, 오늘 밤에는 뭐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지미가 이스탄불에서 사 온 카드 한 벌을 꺼냈다. 모두 포커를 떠올렸지만 우리는 돈을 안 걸어도 되는 게임을 하기로 했다. 포커 말고 우리가 모두 아는 게임이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국적만큼 각자 다른 게임을 제안했고, 오늘은 내가 말한 한국 게임을 하기로 했다.
"게임 이름이 뭔데?"
"원카드"
"아니, 한국 이름으로는 뭔데?"
"원카드"
다시 말해줬더니 다들 웃었다. 한국 게임 이름인 원카드, 조금 넌센스긴 하다.
다행히 대부분 비슷한 게임인 우노의 룰을 알고 있어서 설명하기가 편했다. '이건 옆사람한테 세 장 먹이는 카드, 이건 순서 건너뛰기 카드...'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고 연습 게임을 했더니 다들 알아들은 것 같았다.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있던 마누엘만 빼고. 마누엘이 자꾸 이해를 못해서 다들 그를 놀렸다. 그리고 모두 이기는 것보다 옆 사람을 괴롭히는데 중점을 둬서 그런지 게임이 안 끝났다.
"이런 처절한 게임을 하다니, 한국인들은 인내심이 대단한가 봐."
마누엘과 마지막까지 이어진 기나긴 싸움을 마치고 일루아가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