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단길 이야기-28
#95 달콤 쌉싸름한 라크
여행을 떠나기 전 '파밍 보이즈'라는 독립영화를 본 적이 있다. 세 청년들이 유기농 농장 커뮤니티인 '우프(WWOOF)'를 이용해 유럽 곳곳을 누비며 농장에서 일도 하고, 요리도 배우고 친구들도 만드는 내용의 영화였다. 다 떨어진 작업복을 입고 변변치 못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지만, 내 눈에 그들은 빛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꼭 비슷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었고, '워커웨이(Workaway)'라는 비슷한 플랫폼을 이용해 단기 워커를 받는 농장을 찾았다. 그리고 이스탄불 근교 코자엘리의 한 유기농 농장을 찾아 리퀘스트를 보내 두었다. 호스트인 부락은 2주간의 내 리퀘스트를 받아주었고, 다음 주부터 나는 그곳에서 지내야 한다. '시골에 내려가기 전에 여기서 원 없이 놀고 가야겠다'는 것이 부락의 이메일을 보고 바로 든 생각이었다.
술친구를 찾던 나에게 마침 인스타그램으로 메시지를 보내온 수잔. 우연히 받은 다이렉트 메시지였지만 그녀는 오늘 밤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며 나를 초대해줬다. 미리 도착해 주변을 둘러볼 생각으로 점심을 먹고 호스텔을 나서 약속 장소인 카드쿄이로 향했다. 카드쿄이는 이스탄불의 아시안 사이드에 있는 지역으로, 페리를 타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야 했다. 아시아 지구와 유럽 지구를 잇는 페리는 나처럼 재미로 타는 사람도 있겠지만, 매일의 교통수단으로 활용하는 터키 사람들이 훨씬 많은 듯했다. 가격도 지하철의 운임과 비슷한 수준으로 저렴하다. 올드 모델을 타면 나무로 된 내부에, 정겨운 느낌의 선내 매점까지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매점에서 레모네이드를 한 잔 샀다.
갑판 위에서는 시원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애매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그늘막 밖으로 나가면 바로 땡볕이라 그늘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이 짙푸른 해협의 존재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매력은 배가 된다. 강을 낀 도시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둔 도시의 차이는 청계천과 한강의 차이만큼 크다. 배는 큰 소리도 한 번 내지 않고 대륙을 건너 아시아에 나를 내려줬다.
처음 와본 카드쿄이는 이제껏 내가 돌아다니던 이스탄불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구도심인 탁심이 이제 중국인과 아랍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지루한 동네가 됐다면, 여기는 수염을 멋있게 기른 터키 남자들이 펍을 찾아 축구 경기를 보는 곳이다. 이 곳을 연고지로 하는 터키의 축구팀은 그 유명한 페네르바흐체. 오늘은 포르투갈 팀인 벤피카와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경기가 있는 날이라 길거리에는 남색과 노랑 줄무늬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부둣가에서 수잔과 그녀의 친구 부쉬라를 만났다. 부쉬라도 페네르바흐체의 팬이라 축구팀의 로고가 박힌 머플러를 두르고 나왔다.
"바로 술 마시러 갈까? 나 술 엄청 잘 먹으니까 조심해."
수잔의 친구인 부쉬라는 호탕한 성격의 친구인 것 같았다. 우리는 길가의 케밥집에서 간단히 속을 채우고 경기 킥오프 시간에 맞춰 펍에 자리를 잡았다. 야외 테이블은 인도를 따라 조밀하게 놓여있어 옆자리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한두 마디씩 주고받게 된다. 펍은 역시 페네르바흐체 팬들로 채워져 있었다. 축구 경기는 지루했다. 하지만 페네르바흐체가 1:0으로 끌려가다가 동점골을 넣었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미스터, 터키에서 제일 좋아하는 축구팀이 어디야!!"
"당연히 페네르바흐체!! 와아아!!"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옆 자리에 앉은 아저씨 팬은 축구팀의 머플러를 기념품이라며 선물로 줬다. 나는 머플러를 바로 목에 둘렀다.
"너 라크 먹어봤어?"
"라크?"
"터키 전통 술인데, 한 40도? 보드카랑 도수는 비슷할 거야. 너만 괜찮으면 한 번 마셔볼래?"
부쉬라의 권유에 우리는 라크를 주문했다. 그녀가 보여준 라크를 마시는 방법은 따로 있다. 라크 잔에 반 정도 술을 채운 후 나머지 절반은 얼음과 물을 붓는다. 투명한 술은 물과 섞이며 우유처럼 뿌예진다. 색이 변하는 모습이 과학 실험 같았다.
"쉐레페!"(건배!)
차가운 술에서는 쌉쌀한 아니스 향이 강하게 났다. 안주로 나온 수박과 멜론, 삶은 콩 요리로 입안을 헹구고 부쉬라의 재촉에 다시 잔을 채웠다.
"근데 너네 저 큰 병을 다 먹을 수 있겠어?"
술을 잘 못 먹는다는 수잔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 뒤 병을 비웠다. 기분이 좋아졌다.
"야, 내 친구들이 이 근처에서 클럽에 간다는데 같이 갈래?"
"당장 가자!!"
이미 신난 우리는 수잔의 친구들이 있다는 록 클럽으로 자리를 향했다. 터키인들은 술을 먹으면 꼭 길에서 미디예나 코코레치라는 간식을 사 먹는다. 우리나라의 해장국과 비슷한 개념인지, 카드쿄이의 술집 거리 근처에는 두 음식을 함께 파는 스낵바가 많았다. 홍합 안에 든 밥이라는, 직관적으로 생긴 미디예와 달리 무언가를 바싹 구운 코코레치는 재료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근데 코코레치는 재료가 뭐야?"
"한 번 먹어봐, 먹어보고 어떤지 말해줘."
그들은 코코레치가 든 빵을 내 앞에 두고 반응을 관찰하듯 지켜봤다. 빵을 들고 한 입 먹었을 때, 익숙한 곱창의 꼼꼼한 향이 났다.
"이거 내장이네? 나 한국에서도 곱창, 막창 좋아하는데 한 입 먹으니까 한국 생각이 났어."
"진짜 내장인지 알고도 먹을 수 있어? 사실 이거 터키에서도 못 먹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 번 먹어보라고 한 건데 하하"
나중에 이 친구들이 대구에 오면 안지랑의 곱창 골목에 데려가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미디예를 하나 집어 레몬즙을 뿌리고 입에 넣었다. 보기와는 달리 심심한 맛이라 열 개는 그냥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록 클럽 앞에서는 파트마누르, 외즈게와 남자 친구 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이스탄불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 또래 친구들이었다. 우리가 클럽에 들어가려는 찰나 몇 명의 남자들이 우리에게 동행을 청했다. 모든 클럽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남자만 온 그룹은 입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다른 그룹에 껴서 슬쩍 입장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전해 들었다.
클럽의 내부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이다. 어두운 실내, 가득 들어찬 사람들, 플라스틱 컵에 든 프리 드링크 한 잔. 나는 진토닉을 받아 들고 무대 쪽으로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무대에는 록밴드가 공연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드럼 소리가 가슴을 쿵쿵 울렸고, 낮게 웅얼거리는 터키어 가사도 듣기가 좋았다. 지난달 에멜의 결혼식 때 배우고 잊고 있었는데, 알리가 전통춤인 할라이를 다시 가르쳐줬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손과 발이 자꾸 따로 놀았다. 어차피 어두워서 잘 안보이겠지, 우리는 다 같이 새끼손가락을 잡고 춤을 췄다.
"현진, 내일 알리네 집에 다 같이 수영하러 갈 건데, 너도 올래?"
내 귀를 잡고 소리치듯 누르가 물었다.
"에벳!(좋아), 어디로 가야 해?"
"오르타쿄이로 오면 돼. 그러면 우리가 데리러 갈게."
누르의 초대를 받고 수잔과 부쉬라를 따라 클럽에서 나왔다. 몇 시간 서서 춤을 췄다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클럽 안에서도 술을 계속 먹더니, 부쉬라는 결국 전봇대를 잡고 토를 했다.
"음, 여기 술 잘 먹는다고 한 사람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제발 닥쳐."
수잔과 부쉬라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지금 탁심까지 택시를 타면 엄청 비싸다며 자기들 집에서 재워준대서 따라갔다. 도착한 집에서는 양치도 안 하고 소파에 쓰러졌다. 술 먹고 양치 안 하면 이 썩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96 우리들의 풀 파티
입안이 쩍쩍 달라붙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물을 조금 마셨다. 수잔과 부쉬라도 방문을 열고 엠티 다음날 같은 몰골로 나타났다.
"오늘 호스텔 체크아웃 날이라 탁심에 가봐야 해..."
마음 같아서는 다시 누워서 자버리고 싶었지만, 체크아웃 전에 짐을 빼야 하기 때문에 어렵사리 눈곱만 떼고 거리로 나왔다. 조금 걸으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도 같다.
냄새가 거리 전체에 배인 길들이 있다. 대구 약령시에 가면 한약 냄새가 풍기는가 하면, 안지랑 곱창 골목에서는 초벌구이를 하는 고소한 냄새가 골목 가득히 배여있다. 이스탄불에도 내가 좋아하는 길이 있다. 베식타스 페리 터미널에서부터 시라간 호텔과 돌마바흐체 궁전 담벼락을 끼고 난 길에서는 햇볕에 말린 나무 냄새가 짙다. 담장 안 궁전의 나무들과 가로수로 심어진 플라타너스까지 더해져 비록 항상 차들로 붐비는 도로를 끼고 있지만 좋은 냄새가 난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궁전 담벼락이 끝나면 비로소 바다가 보인다. 톱하네에 다다르면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함께 물담배 카페 거리에서 뽁뽁 뿜어져 나오는 달큼한 나르길레 냄새가 희미하게 뒤섞여 떠다닌다.
호스텔의 짐을 정리하고 다시 친구들을 만났다. 알리가 차를 몰고 와 나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어서 와! 수영복은 챙겼지?"
알리의 볼보에는 이미 누르와 외즈게가 함께 타고 있었다. 이어 오르타쿄이에 있는 알리의 집에 도착해 손님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는 리치 키드인 것 같다. 부모님은 사업 때문에 지방에 계시고, 혼자 대학교 때문에 이스탄불에 사는데 자취방이 아니라 풀장까지 딸린 빌라에 살고 있었다. 이 집에는 용도가 뚜렷한 방이 많다. 옷방, 손님방, 공부방 같이. 알리의 디비디 룸은 조금 부러웠다. 빔 프로젝터를 쏠 수 있는 스크린에 책장 가득 꽂힌 디비디들. 막상 별로 보지도 않는다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관리인이 알리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며 문을 열어줬다. 우리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간 수영장 물은 차가웠다. 어릴 때 수영을 조금 배웠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목만 수면 밖으로 꺼내놓고 팔다리를 저어 물에 뜬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뿐. 알리는 체격이 꽤 큰데도 수영을 잘했다. 오히려 바다코끼리처럼 육지에서는 굼뜨지만, 물 안에서 더 날렵한 것 같았다. 나를 보다 못한 누르가 붙어서 물에 뜨는 법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등에서 손을 떼기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한두 시간 물장구를 치고 놀았을 뿐인데 물 밖으로 나오니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물에 안 빠지려고 발버둥을 쳐서 그런지 허기가 밀려왔다. 우리는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수영장 한쪽에 딸린 펍의 플라스틱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벽면 한쪽의 스크린에서는 축구 경기를 중계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감자튀김과 소시지, 칼스버그를 주문했다. 수영하고 먹는 감자튀김과 맥주는 최고였다. 갓 튀겨낸 듯한 뜨거운 감자튀김을 마요네즈에 푹푹 찍어먹었다. 그만큼 열심히 놀았으니 몸에서 다시 열량을 채우는 거겠지. 맥주 두 병에 술기운이 나른하게 퍼졌다.
#97 명절의 분위기
"현진, 들어봐. 오늘 낮에 우리 언니를 만나러 갈 건데 같이 갈래?"
다시 알리의 집, 손님방을 차지하고 있던 나에게 누르가 불쑥 들어와 말을 걸었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터키의 명절, 바이람 연휴가 올해는 일주일이나 되기 때문에 언니네 부부는 고양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그녀에게 부탁을 하고 고향에 간다고 했다.
알리와 외즈게는 아직 자고 있었다. 우리가 부스럭거리며 문을 열자 외즈게가 나와서 인사를 해줬다.
"안녕, 이틀 동안 너무 즐거웠어! 다음에 또 만나"
버스를 타고 언니가 사는 메지디에쿄이로 나갔다. 언니를 만나기 전에 시간이 조금 남아서 아침식사 카페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곳은 그동안 갔던 곳들과는 다르게 마트형 식당이라 치즈나 소시지, 주스가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테이블 옆에 있는 냉장고나 진열대에서 가져다 먹으면 된다. 누르에게 부탁해 벌집이 들어간 꿀을 추가해서 버터와 섞어 먹었다. 역시 아는 맛이 제일 맛있지.
스타벅스에서 만난 누르의 언니는 동안의 얼굴 때문인지 서른이 넘었다는 나이가 무색하게 대학생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누르가 미리 말해줬는데, 언니의 남편은 터키의 국민 로커인 하이코젭킨(Hayko cepkin)의 밴드에서 드럼을 친다고 했다.
"진짜? 그럼 막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알아보고 그래?"
"응, 물론 드러머라서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진짜 팬들은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어."
누르의 언니는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녔다며 자꾸 영어와 프랑스어 단어를 헷갈려서 섞어 썼다. 나를 배려해서 그런지 동생에게 이야기할 때도 영어를 써서 고마웠다.
스타벅스에서 오후를 보내고 누르와 함께 오르타쿄이로 돌아가 저녁을 먹었다. 알리와 외즈게에게도 연락을 했지만, 다들 명절이 코앞이라 고향에 내려갈 준비로 바쁜 것 같았다. 설날이나 추석 전 분위기와 비슷했다. 명절 전 마지막 주말이라 그런지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있었다. 여름인 만큼 매미 소리가 듣고 싶은데 여기는 매미가 없다. 대신 사람들 말소리로 시끄러운 거리를 걷다 노점에서 오르타쿄이의 명물인 쿰피르와 와플을 사 먹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벤치에 자리를 잡기가 힘들었다. 나도 내일이면 이 사람들처럼 시골로 내려간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들떴다. 바닷바람이 조금 강하게 불었고, 여름밤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