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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Feb 28. 2020

여행자들의 작은 일탈_부쿠레슈티, 루마니아

나의 비단길 이야기-34

#116 콘크리트로 만든 궁전



 호스텔까지는 걸어서 1시간, 배가 고프다. 날이 밝아지며 빵집들은 벌써 문을 열었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길거리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빵집 앞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니 나도 하나 먹고 싶었다. 하지만 돈을 뽑을 만한 곳이 보이질 않는다. 대신 부쿠레슈티의 중심부를 통과해 커다란 정부 건물들을 지나 호스텔에 도착했다.  


 숙소에는 배낭만 던져두고 곧장 빵을 먹으러 나왔다. 은행을 찾아 루마니아 돈인 레우를 조금 뽑고 아까 지나친 빵집으로 돌아가 커다란 꽈배기 빵을 두 개 샀다. 먹이를 쟁취한 맹수의 기분을 느끼며 공원 벤치에 앉아 빵을 뜯어먹었다. 기름에 튀긴 빵에는 설탕이 가득 뿌려져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막상 하나를 다 먹었더니 물린다. 차나 커피라도 한 잔 있었으면 싶었다. 돈이 아까워서 두 개째를 베어 물었지만 결국 다 못 먹고 내 주변을 맴도는 비둘기들에게 나눠줬다.  


 

 그래도 뭘 좀 먹으니 기운이 났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호스텔로 돌아갔다. 체크인을 하며 내 옆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중국인과 말을 텄다. 중국 이름은 발음하기가 항상 힘들다. 왕젠샤는 쓰촨 출신이라 내가 중국을 여행하며 먹은 쓰촨 음식 얘기에 흥미를 보였다. 

 "훠궈? 하오하오, 하오츠!" (훠궈? 좋아요, 맛있어요)

 이스라엘에서 중국어를 가르친다는 그는 나의 옹알이 같은 중국어 몇 마디도 곧잘 알아들었다. 우리는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부쿠레슈티에서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구해 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리퀘스트를 늦게 보내는 바람에, 호스트를 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중 한 명에게서 답장이 왔다. 

 '안녕, 니가 보낸 리퀘스트 잘 읽었어. 나도 호스팅을 해주고 싶지만 이미 그 날짜에 게스트가 오기로 해서 힘들 것 같아. 하지만 다 같이 식사나 술 한 잔 정도 괜찮다면 너도 와도 좋아.'

 라모나에게서 시내 중심부 근처의 괜찮은 식당까지 추천받았다. 저녁때가 되어 왕젠샤를 데리고 추천받은 식당으로 향했다. 귀여운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의 이름은 '라 플라친테(La Placinte)'. 정통 루마니아 요리법이라기보단 몰도바식에 가깝다며 웨이터는 우리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잘 모르는 나에게는 거기서 거기다.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돼지고기를 판다는 것. 그동안 계속 이슬람권을 여행한 탓에 돼지고기를 보기가 힘들었다. 오랜만에 씹어보는 기름진 돼지고기의 맛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오늘은 마침 분수쇼를 하는 날이었다. 시내 공원의 분수들을 보수한 기념으로 하는 행사라며 웅장한 노래와 조명에 맞춰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부쿠레슈티의 랜드마크인 인민궁전을 보러 갔다. 단일 행정건물로는 미국의 펜타곤 다음으로 무겁다는 곳은 지금은 루마니아 의회로 사용되며 내부 관람은 따로 투어를 신청해야 한다. 하지만 겉에서 흘긋 보기에도 거대하기만 한 콘크리트 건물의 내부는 지루해 보였다. 무시무시했던 옛날 독재자가 지은 이 차가운 궁전은 지금은 커다란 스크린이 되어 쇼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117 붐바야, 오빠!


 '어젯밤에 제 게스트들이 와서 오늘 시내를 구경시켜주려는데,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와도 좋아요.'

 늦잠을 자고 일어나 라모나의 메시지를 받고 급하게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구시가지 중심부의 대학 광장으로 달려가 라모나와 그녀의 게스트들을 만났다. 피비와 리키, 영국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리키가 한국말로 인사를 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는 블랙핑크의 팬이라며 갑자기 '붐바야'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 중간중간 '오빠!' 하는 추임새를 간드러지게 살려 소름이 돋았다.  

 


 라모나는 투어 가이드처럼 우리들을 시내 여기저기로 데려다줬다. 부쿠레슈티에서 가장 예쁜 서점이라던가, 그래피티가 멋진 거리 같은 관광안내 책자에는 나오지 않는 곳들로. 지나다니며 본 이 도시의 건물 벽은 멀쩡한 곳이 없는 것 같다. 오래됐건 신축이건 관계없이 빼곡하게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다. 그래피티 예술가가 직접 작업한 아름다운 작품들도 있지만 꼬마들이 라커로 지익 그어 놓은 듯한 보기 안 좋은 낙서가 더 많았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진작에 건물주가 다 신고해버리지 않았을까? 



 "얘들아 난 잠깐 실례할게. 틴더로 만난 애가 잠깐 시간 된다고 보자고 하네? 금방 갔다 올게."

 게이인 리키는 채팅 어플로 알게 된 루마니아 남자와 데이트가 있다며 우리를 남겨두고 먼저 가버렸다. 

 "굿 럭 리키!"

 우리는 그에게 손가락을 꼬아 보이고 잠깐 쉬어갈 맥주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리키는 걷는 내내 트와이스나 블랙핑크 같은 케이팝을 불러대서 그가 가버린 뒤에도 머릿속에 멜로디가 남아 혼자 군인처럼 노래를 흥얼거렸다. 곧 라모나의 휴대폰이 2만 걸음을 돌파했다고 알려왔고, 우리는 해피아워 할인을 하는 펍에 들어가 앉았다. 


 

 내가 시킨 콰트로 포르마주 펜네는 치즈 맛이 너무 강했다. 한 입 먹으면 맛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절대 한 접시는 비울 수 없는 맛. 느끼한 기름기는 맥주를 부어 씻어 내렸다. 

 "여기 맛있어? 나도 메뉴판 달라해야겠다. 배고파 죽을 거 같아."

 데이트를 하러 간다던 리키는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분위기를 봤을 때 잘 안된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는 햄이 들어간 클럽 샌드위치에 마요네즈와 머스터드소스를 듬뿍 뿌려먹었다. 그가 소스를 손에 묻혀가며 열심히 샌드위치를 먹는 걸 보고 있으니 방금 파스타를 반 접시 먹었지만 또 먹고 싶었다. 이따 술도 먹어야 하니까, 대신 피비가 시킨 나초를 집어 먹었다.  


 

 모두 식사를 마치고 알앤비 음악이 나오는 펍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모나는 루마니아의 시그니처라며 미터 비어를 주문했다. 

 "이건 맥주가 1미터짜리로 나오는 거야."

 그녀의 설명에 우리는 모두 세로로 긴 맥주 타워 같은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곧 등장한 미터 비어는 1미터 정도의 나무판자 위에 500들이 맥주가 8잔 정도 줄지어 서있는 모양새였다. 꽤 많아 보였지만 우리도 4명이기 때문에 '한 명이 2잔씩 먹으면 되겠지' 하는 계산이 섰다. 

 "야 이거 얼른 먹고 1미터 더 추가해? 오늘 맥주 2미터 가능한 거야?"

 "음, 나는 오늘 속이 안 좋아서 맥주는 못 먹겠는데 애플 사이다 한 잔 시켜도 될까?"

 "나도 술은 잘 못 먹는데, 한 잔만 마실게"

 갑자기 리키와 피비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 나와 라모나는 서로를 허탈하게 쳐다봤다.  

 "에헤이, 영국인들 갑자기 왜 이러실까."   



 결국 나와 라모나가 미터 비어를 다 비우다시피 하고 일어났다. 다 마신 맥주잔을 다시 나무틀에 꽂는 재미가 있었다. 그동안 써머스비를 홀짝거리던 리키는 가라오케에 가고 싶어 했지만 근처에는 너무 비싼 곳 밖에 없었다. 

 "리키, 한국에 오면 내가 노래방에 데려가 줄게. 블랙핑크, 트와이스 노래 다 있어, 니가 분명 좋아할 거야."

 실망한 리키에게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넘치는 흥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잘 자!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한테 꼭 말해주고, 늦잠 자지 말고."

 내일은 다 같이 근교 도시인 브라쇼브에 가기로 약속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 못 일어날까 걱정이 됐다. 이를 닦으며 다음날 아침에 연달아 울릴 알람을 5개나 맞췄다. 밤늦게 돌어간 8인실 방에는 어제와 같이 왕젠샤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118 술이라면 아일랜드 사람에게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다행히 늦지 않게 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약속 장소에 없었다. 역 안의 맥도날드 앞에서 공짜 와이파이를 잡아 라모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벌써 도착했어? 미안, 피비랑 리키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조금 늦을 것 같아.'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는 타려던 기차를 놓쳤다.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깔끔하게 돌아섰다. 

 "내일 가지 뭐, 배고픈데 아침이나 먹자."

 아까부터 맥모닝이 먹고 싶었던 내 제안에 모두들 맥도날드로 향했다. 하지만 카운터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줄은 왜 이렇게 안 빠지는지, 주문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맥모닝 시간이 끝나버렸다. 

 "기차 놓친 건 상관없는데, 이건 좀 화나네 하하" 


귀여운 스낵바


 할 일이 사라진 우리는 뭐하지, 뭐할까만 반복되는 토론을 거쳐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눕고 싶다는 우리를 라모나가 데려간 곳은 미하일 1세 공원. 도심에 있는 공원 치고 규모가 꽤 크다. 팝콘을 하나 사서 나눠먹었다. 우리는 자리도 안 깔고 그늘이 진 잔디밭에 누웠다. 딱히 대단한 얘기를 하지는 않고, 각자 유튜브에서 본 웃긴 동영상을 서로 보여주며 깔깔댔다. 리키가 보여준 것은 일본식 영어 발음인 재팽글리쉬로 찍은 뮤직비디오였다. 

 "마그도나르도, 구구르, 토이레또"

 "맥도날드, 구글, 토일렛?"

 "너 진짜 퍼킹 레이시스트구나 리키?"

 "응 너도 웃었거든, 엿이나 먹어"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 그늘의 방향이 바뀌어 눈이 부셨다. 우리는 해를 피해 그늘을 따라 나무 주위를 굴러다녔다.


 

 "있잖아 얘들아, 나한테 카우치서핑으로 방금 연락 온 애가 있는데, 걔도 이따 저녁때 와도 될까?"

 "그래, 좋아. 그럼 우리도 슬슬 일어나서 시내로 나갈까?"
 우리는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시내로 나가 새로운 친구인 칼럼을 만났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강한 아일랜드 악센트를 써서 영어를 하는데도 가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의사소통에 언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아일랜드인 답게 술에 환장하는 친구였다.  


 칼럼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맥주를 연거푸 마시더니 취해버렸다. 

 "야 칼럼, 너 킹스맨 태런 에저튼이랑 토트넘의 해리 케인을 섞은 거처럼 생긴 거 알아? 내 말은 둘 다 닮았다는 거야."

 "어어? 난 둘 다 좋아하거든. 칭찬이지? 어쨌든 좋네, 술이나 마시자! 여기 위스키가 있나 한번 물어봐야겠다. 너 아이리쉬 위스키 마셔봤어?"

 "아니, 안 마셔봤는데."

 내 대답에 불만족한 칼럼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럼 너네는 위스키 먹어본 적도 없는 거야!!"

 곧이어 그는 종업원을 불러서 아일랜드산 위스키가 있는지 물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없다고 하자 화를 바락 냈다. 

 "그럼 이 가게에는 위스키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술 취한 사람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진상 부리는 친구는 오랜만이다. 리키와 나는 술을 더 주문하려는 그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카메라 앞의 리키


 우리는 겨우 칼럼을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야, 얘 집에 보내야 할 거 같은데? 어디 공원 같은데 던져놓을 수도 없고... 숙소가 어디랬지?"

 양 옆에서 그를 지탱하고 있는 우리를 의식하는지 안 하는지 그는 밤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헤이, 자켓 멋지네. 하이파이브 한 번 해."

 "아 칼럼, 제발 좀!"

 루마니아 사람들은 다들 착한 것 같았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달려들어 친한 척을 한다면 뭐라고 할 법도 한데, 모두들 웃으며 칼럼의 술주정을 받아줬다. 


 "너도 우리 집 가서 같이 잘래?"

 "그래, 같이 가자. 어차피 내일도 브라쇼브에 같이 갈 거잖아."

 술을 더 먹으러 가자는 칼럼을 겨우 달래서 보내고 우리는 모두 지쳐버렸다. 나도 혼자 호스텔로 돌아가기 귀찮아 라모나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라모나의 집은 교외의 작은 아파트였다. 그녀는 부엌 창문을 열고 창가에서 담배를 피웠다. 

 "내가 그린 그림 보여줄까?"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는 그녀는 스케치북을 펴 자기가 그린 캐릭터들을 보여줬다. 어릴 때 봤던 디즈니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119 똑똑, 누구세요


 '야야야 야이야이야, 붐붐바, 붐붐바, 오빠!' 

 리키가 아침부터 붐바야를 크게 틀어서 나를 깨웠다. 리키의 오빠 소리에 잠이 번쩍 달아났다. 잠은 깼지만 멜로디는 여전히 방 안을 시끄럽게 휘저어놨다.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우리는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오늘의 계획을 짰다. 

 "우선 시나이아에 들러서 오래된 성을 하나 보고, 브라쇼브에 가자. 그리고 거기서 저녁을 먹고 밤에 다시 돌아오는 거야."

 라모나의 계획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하고 시나이아행 기차표를 사고 어제처럼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먹었다. 


지하철역

 

 열차 출발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려는데, 주머니를 더듬어본 내 손에 기차표가 잡히지 않는다. 급하게 창구로 가서 다시 표를 살까 했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출발 30분 전부터는 그 기차의 표를 팔지 않는다. 친구들과 함께 대합실로 돌아가 바닥을 샅샅이 뒤졌지만 표는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거짓말 같은 일이 왜 나한테 일어난 걸까, 잠깐 운명을 원망했다. 

 나 때문에 우리 일정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서 돌아가기도 억울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심보로 그냥 기차에 올랐다. 

 

 "표 검사는 이따 검표원들이 돌면서 한 명 한 명 보는데... 좀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겠어?"

 "아 괜찮아, 옛날에 그리스에서도 몇 번 무임승차했었어. 한 번은 걸렸는데 몰랐다면서 표 값을 냈더니 봐주더라. 이번에도 크게 다르겠어."

 걱정하는 라모나에게 일단은 큰소리를 쳤지만 기차가 출발하면서부터 마음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객차의 문에 집중하고 있을 때, 마침내 검표원이 문을 열고 우리 칸에 들어와 표 검사를 시작했다. 나는 슬쩍 그 눈을 피해 화장실로 달아났다. 나는 이미 기차 삯을 냈는데 표가 없다는 이유로 왠지 무임승차하는 기분이 들었다.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고 넉넉하게 5분을 헤아렸다. 이제 나가야지, 문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설마 검표원이겠어'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내 앞에는 제복을 입은 검표원들이 서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나는 우선 웃어 보였다. 

 "헬로, 헤브 어 나이스 데이."

 그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지나가는 나를 막아서지도, 표를 보여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내 자리로 걸어오며 뒤통수가 따가워 감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2시간 뒤 시나이아 도착 안내 방송이 나왔을 때 비로소 긴 숨을 몰아쉬었다. 시나이아는 고도가 꽤 높은 도시다. 낮은 구름이 걸린 산에서 찬바람이 불어와 옷을 얇게 입은 우리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한 줄로 서서 고성(古城)인 펠레슈 성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걸었다. 성의 입구에서 입장권을 샀다. 내부 입장은 단체 관람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도슨트의 시간에 맞춰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가만히 있으니 더 추워서 꼼지락거리며 몸을 계속 움직였다.  



 중얼거리는 도슨트의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성 안의 옛날 가구들은 마음에 들었다. 이 성에는 역대 주인의 취향에 따라 각각 다른 양식으로 꾸며진 방들이 많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방들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나는 아르데코 양식으로 꾸민 식당이 마음에 들었다. 라모나는 황금빛 수도꼭지가 달린 욕실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관람 시간을 기다리고 또 성을 둘러보느라 예상보다 시간을 꽤 많이 써버렸다. 다시 돌아온 기차역의 벽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브라쇼브까지 또 가기에는 늦었다'로 의견이 모였다. 

 "그럼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배도 고픈데."

 계속 추위에 떨었더니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식당에 들어가 소고기 수프와 밥을 주문했다. 기름이 동동 뜬 수프에 밥을 말아먹었다. 내가 하는 것을 본 친구들은 모두 밥을 추가로 주문했다. 



 "잘 가, 나중에 런던에서 만나. 그때 진짜 재밌는 곳 다 데려가 줄게."

 덜덜거리며 굴러가는 기차를 타고 부쿠레슈티 역에 내렸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내일 영국으로 다시 간다는 친구들과의 아쉬운 인사를 뒤로하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어, 이제 오셨네요. 이틀 동안 안 들어와서 걱정했는데, 오늘도 안 들어오면 실종 신고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잖아요 하하"

 오랜만에 들어오는 나를 본 호스텔 스태프는 진담 같은 농담을 건넸다.   


#120 지금 만나러 갑니다


 부다페스트행 기차는 5시에 출발. 라모나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고 그녀의 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기차를 타러 가기 위해 일어났을 때 생각보다 여유 시간이 없어서 뛰어야 했다. 늦지 않도록 항상 미리 가 있으면 좋을 텐데 요즘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지각하는 버릇이 다시 나오고 있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숨을 헐떡이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초조한 마음으로 남은 지하철역의 개수를 셌다. 다행히 기차역에는 시간 맞춰 도착했다. 야간 기차에서 먹을 소시지빵과 물을 사며 남은 루마니아 돈을 털었다. 6명이 함께 쓰는 3층 침대칸 승객은 나 한 명 밖에 없어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브라쇼브를 지날 때쯤 사람들이 꽉 찼다. 모두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이어폰을 꽂았다. 

 원래 계획에 없던 부다페스트. 그곳에서 동아리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4년도 더 전에 연극을 같이 했던 인학 형. 내가 꽤 따르던 그 형이 졸업하고 난 후 자연스럽게 얼굴을 볼 일도, 연락도 차차 뜸해졌다. 하지만 유럽여행 중이라는 형의 연락을 받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거리인 헝가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에 있던 민속주점에서 막걸리를, 지나간 연극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동아리방에서는 쿨피스 섞은 소주를 같이 마시던 인학 형. 뜬금없이 헝가리에서 만난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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