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를 끊은 지 딱 일주일째 되었던 9월의 어느 일요일. 하필이면 모처럼육아에서 해방된 날과 겹치다니.
생각해보니 출산 후 온종일 나만의 자유시간을 가진건 처음이었다. 반나절, 길게는 7시간 정도는 있었어도 하루 종일 휴가는 16개월 만이었다.
1분 1초도 허비하고 싶지 않은 나의 심정을 입대 후첫 휴가를 앞둔 이등병만이 이해할 것이다. 전날 밤늦게까지 동선을 짜고 특식 메뉴를 정하며, 혹시나 코로나 19로 인해 휴업을 하진 않는지, 영업시간 확인도 놓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침 7시부터 집을 나서고 싶었지만, 오래간만에 늦잠도 자줘야 휴가지 싶어 느지막이 9시에 설렁설렁 집을 나섰다.
요즘 밀가루를 안 먹고 있지만, 이렇게 특별한 날 빵으로 기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행선지로 내가 먹어도 되는 빵, 노 밀가루, 글루텐 프리 비건 빵집으로 향했다.미처 몰랐는데 꽤나 유명한 빵집인 모양이었다. 마침 다음 주부터 임시 휴업에 들어간다니, 이건 운명이었다.
밀가루 없이는 살아도 빵 없이는 못 살아
밀가루를 넣지 않은 바게트라니. 설탕이 안 들어간 크림치즈 스프레드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빵 덕분에 더없이 행복하고 완벽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빵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더 많은 분쟁과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뒷목을 잡고 가슴 깊이 분통 나는 일이 있어도 빵과 디저트로 누그러졌던 날들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던가. 새삼스레 나는 사실 샤이 빵순이 었음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행복은 정말 별 게 아니었다. 세계 여행을 가고 숲 속에 들어가 침묵 수행을 하고 각종 익스트림한 도전을 통해서만 행복의 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있다면, 애먼 고생하지 말고 일단 한 달만 밀가루를 끊어본 후 갓 구운 빵을 왕 하고 베어물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한 달이 무슨 말인가. 나는 일주일 만에도 행복의 조건을 찾았는데.
빵으로 궁극의 기쁨을 맛보고 카페를 나서니 파란 가을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과장 좀 보태, 16개월 동안 아이를 키우며 고생한 나를 우주가 위로해주는 듯한 날씨였다. 그깟 빵이 뭐라고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다니. 아무튼 나는 밀가루 없이는 살아도, 빵 없이는 못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