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왓챠에서 다큐멘터리 한 편을 봤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귀여운 동물들> 이라니, 무슨 제목을 이렇게 지어놨어. 작정한 거잖아. 원제는 심지어 "super cute animals"야. 노골적이군.’하면서 정확히 의도대로 걸려들어 보고야 만 것이다. 첫 장면부터 온통 귀엽다. 장면 장면 모조리 캡처 감이다. 인스타그램 피트를 모아놓은 것만큼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이런 걸 보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귀여운 방법도 가지가지다. 소리, 외모, 행동, 상황 무엇이든 다 귀엽다. 하루에 16시간이나 먹는 판다는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어도 귀엽다. 사실 그래서 귀엽다.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님은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쉴 때는 유튜브로 귀여운 동물들 영상을 보신다고 했다. 이해할 수 있다. 무해한 동물의 새끼들을 보면 창조세계의 원형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하게 된다. 귀여운 걸 보면 도파민이 분비되는 걸 ”귀여움에 대한 반응"이라고 과학자들이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도 귀엽다. “귀여움에 대한 불가항력” 같은 말을 진지하게 쓰다니. 그런 용어가 정말 있다는 건지 만들어 낸 건지.
모든 어린 생명체들은 필연적으로 귀엽다. 그들은 다 큰 것들보다 둥글고 작고, 따뜻하다. ”귀여움에 대한 불가항력“처럼 “귀여운 건 따뜻하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해도 될 것 같다. 얼마 전 가게에 동생 친구가 아기를 데리고 왔다. 내가 특별히 지켜보는 아기들 중 한 명인데 토실토실하고 순하고 머리숱이 많은 12개월 남자 아기다. 친구들과 동생이 한참 수다를 떠는 동안 빼꼼히 아기를 쳐다보면서 ‘나한테 애를 데리고 와라.’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집에 갈 시간이 되어서야 유모차가 카운터 쪽으로 움직였고 나는 왕의 행차를 기다리는 백성들처럼, 혹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길목에 서서 아기를 반겼다. “안녕, 잘 가. 또와.”이건 다 진심이었는데 그때 인사하며 잡은 아기 손이 너무 따뜻했다.
아주 오래 전에 봤던 ‘프리쳐스 와이프’란 영화가 생각났다. 극 중 천사인 댄젤 워싱턴이 윗니 휴스턴과 처음 만나 악수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천사의 손이 믿을 수 없게 따뜻하고 보드라워서 윗니 휴스턴이 놀라는 장면. 그 장면을 보면서 천사의 손은 어떤 느낌이기에 저렇게 놀라는 걸까 상상했었다. 그런데 그날 아기 손을 잡고 몽글몽글 따뜻한 감촉에 놀라면서 나는 비로소 윗니 휴스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 때문에 야외활동이 줄고 배달음식 섭취가 늘어 대한민국 사람들은 올해 평균 체중이 4.9kg 늘었다고 한다. 기사 제목은 ‘나만 살찐 게 아니었어.’였다. 내 맘 네 맘 뭐 그런 의미인가? 아니면 기자가 살이 쪘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뽑은 것 같다. 아무튼 통계적으로 대한민국은 살이 쪘다는데 내 주변 귀여운 아가들은 살이 빠진다. 통계에서 아기들은 제외인 모양이다. 통통한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볼록한 배가 홀쭉해지고 두 턱도 사라지고 손목 팔목 주름이 펴지니 아쉬워서 견딜 수 없다. 아무리 먹여도 살이 빠진다고 했다. 어른들에 비하면 누워서 별로 움직이지도 않는데 뭐가 그렇게 에너지 쓸 일이 많아서 살이 빠지는 걸까. 하루 8번 간식을 먹는 아기도 살이 쪽쪽 빠져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추측해보건대 세상에 적응하느라 그런 게 아닐까. 처음 해보는 일엔 에너지가 많이 든다. 베이킹을 처음 해보는 사람은 능숙한 사람보다 결과가 나쁠지언정 훨씬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되어 있다. 루미 큐브를 처음 할 땐 머리에 쥐가 날만큼 집중하면서도 실패하는데 선수들은 TV를 보면서도 휘리릭이다. 아기들의 일상은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많아서 에너지 소모가 많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엄마가 잘라준 사과 조각을 제대로 입에 넣는 것도 여러 번의 헛손질을 거쳐야 성공할 수 있으니 매일매일이 도전으로 꽉 찬 샘이다. 그러니 먹어도 먹어도 에너지가 빠져나가고 살이 빠지겠지.
동물도 사람도 작고 어릴 땐 그 자체만으로 귀엽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 먹고 싸기만 해도 잘한다고 칭찬받는 수준이다. 성장한다는 건 사랑받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단계로 이동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고 나면 조건 없는 사랑은 거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나약하고 미숙한 어린 녀석들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린 녀석들을 품에 안으면 온기가 느껴진다. 두툼한 살집이 닿을 때 조금이라도 꽉 잡으면 큰일 날 것처럼 조심스럽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은 약하다는 건 때론 가장 큰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아기들이 귀여운 것도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 결과라고 말한다. 약점이 많고 취약하기 때문에 생존의 무기로 귀여움을 장착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내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실은 분석이고 뭐고 필요 없이 귀여운 것들을 보면 마냥 좋다. “귀여움에 대한 불가항력”인 것이다.
가을이고 살찌기 좋은 계절이니, 이번 가을엔 제발 나의 주변 아기들이 살쪘으면 좋겠다. 생존에 유리하도록 귀여움을 풀로 장착하는 개념으로 포동포동 해지는 축복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