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소화한 자리

쓰다 보니 쓰고 나니 괜찮아졌다.

by 분홍공기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 짝꿍의 사고가 난 지

1290일이 지나고 있다.

그 사이 나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병원에서의 남편을 돌보는 간병생활을 했고, 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얼떨결에 에세이 집이

나왔으며 뿌듯함과는 별개로 여전히 글은 쓰고 있다.

손이 닿고, 눈이 바라보고, 마음이 숨 쉬는 자리 어디든 쓰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생각해 보게 된다.


첫 번째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쉬운 사람이었다.

글쓰기가 세 살의 버릇이 마흔을 훌쩍 넘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일기였다.

누군가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는 마음들을 종이에 쓰고 나면 어느새 깃털처럼 가벼워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느낌이 안락함으로 자리 잡아 글쓰기는 현재 나의 삶을 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던 사람의 자리가 부재중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열지 못하는 마음들을 유일하게 내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나의 짝꿍이었다. 우리가 만나서 결혼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대화가 잘 통해서였다. 사주에서조차 너무나 뚜렷하게 나와있다는 뼈 때리는 말을 잘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표현이 쉽지 않은 나는 댐에서 물이 방류하듯 정제되지 않은 직설적인 표현을 쏟아내기가 익숙 사람이다.

그런 표현에 한 번도 날을 세우지 않고 묵묵하게 들어주었으며 품어주던 사람 자체인 그가 있었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상황은 예고 없이 변했고, 지금 내 옆자리에 남편은 있지만 대화는 불가능하다.


짝꿍의 사고 후, 감정적으로 의지할 곳도 마음을 열어놓을 곳이 없어 두려운 마음들을 쓰기 시작했다.

돌봄이 시작되면서는 짝꿍의 상태를 기록하고 노트 페이지 밑 짧게 그날의 느낌들을 기록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들이 시끄럽게 나를 괴롭혔다. 잘 쓰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책으로 남기고 싶은 나의 욕구가 생겼고, 잠을 줄이고 짝꿍의 재활 대기 시간을 쪼개어 핸드폰에도 쓰기 시작했다.

쓰고자 하니, 길이 생겼고 낯설고 모르는 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냥 걸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의 도움과 격려 속에 책이 나왔고, 정신 차려보니 사람들은 나를 작가라고 부르고 있었다.


글 쓰던 시간


작가라는 이름이 부끄럽다.

세상에 얼마나 멋진 작가님들이 많은데, 내 감정쓰레기통 같은 이야기를 읽어줄까?

하는 소심한 마음들도 내 안에 있다. 하지만 그 마음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쓰는 행위에 대한 나의 태도와 쓰고 싶은 나의 이야기에 좀 더 에너지를 쏟아야 함을 이제는 안다.


쓰다 보니, 쓰고 나니 괜찮아졌다.

생에 느낄 수 있는 모든 불편한 감정들로 도배되었던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마주했다.

결혼 2년 차에 예기치 않은 사고로 짝꿍이 최소 의식상태가 되어 현재까지 병상에 있는 내 삶이 괜찮아졌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서 또 누군가는 괜찮을 척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쓰다 보니 누군가가 하는 어떠한 말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쓰고 나니 인생을 송두리째 삼킬 것 같은

슬픔과 두려움이 나를 살릴 수도 있는 필요한 감정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장 큰 슬픔을 소화한 자리에 내 안의 다양한 감정들을 뿌리 삼아 사랑을 삶에 단단하게 심어두었다.


온전한 나의 시간


소화가 잘 된 감정들로 짝꿍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은 나에게 소중하다.

언어로 대화하는 대신 오감으로 대화를 나누고, 그가 주는 작은 신호들이 나에겐 소통이 된다.

혼잣말이 늘었지만 그는 여전히 묵묵히 들어주고 품어주고 있다. 모양은 변했지만 우리가 주고받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짝꿍이 보여주는 눈빛이 백

마디의 말과 행동보다 짙은 의미를 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있다는 것,

그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래서 쓰는 행위와 쓰는 인간이 되어 나는 계속 써갈 것이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여운이

남는다면, 충분하다.

괜찮아지는 날들을 쓰는 행위로 채워보고 싶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나는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