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7
보스턴에서 모아 온 영수증들과 다이어리에 질서 없이 남겨진 메모들. 아직 정리하지 못한 보스턴 여행의 흔적들을 챙겨서 민선배가 일하는 카페로 갔다. 카페를 들어서면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려주는 긴 바가 있는 1층에서 선배는 항상 반갑게 맞아준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오늘은 기분이 어떠냐고 까지 묻고 기분에 맞춰 원두도 추천해주곤 한다. 맛있게 내려주겠다며. 커피를 천천히 정성 들여 내려주는 모습을 보며 앞에 서 있으니 여행은 어땠냐고 묻더라. 너무 좋았다, 특별한 걸 하진 않았지만 날도 많이 안 추웠고 마음이 너무 편했다고 하니 너무 좋았겠다 라며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줬다. 다음 여행 전날에도 찾아가니 좋아하는 것만 실컷 보고 좋아하는 시간들을 만끽하고 오라고 좋은 말을 또 해줬다.
내 나름의 큰 계획 또는 무거운 고민이 있을 때면 꼭 선배를 찾게 된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진심 어린 조언과 따뜻한 격려, 두 가지가 다 되는 내 편이다. 선배랑은 학교에서 만났지만 학교 다닐 당시에는 전혀 친분이 없던 사이다. 학교 식당에서 어쩌다가 점심을 같이 먹은 적이 있는데 그 자리가 처음이자 마지막 사적인 자리였고 선배는 학교를 졸업했다. 친분은커녕 따로 연락한 적도 없는 사이라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도 모르다가 2년 후, 졸업작품을 끝내고 휴학을 하고 홀로 유럽여행을 갔었다. 그때 선배도, 지금의 나처럼 첫 직장을 그만두고 다음 행보를 두고 고민하는 과정에 여행을 갔었다. 그때 선배랑 같은 곳에 있는 걸 어떻게 알게 돼 난 SNS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을 시작으로 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선배는 "안녕! 당연히 기억하지."를 시작으로 답장이 왔다. 우리는 동시에 런던에 있었는데 선배가 파리로 넘어가야 할 일정이었고, 나도 그다음 주면 파리로 넘어갈 일정이라고 말하니 일정이 겹칠 거 같으니 파리로 넘어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하지만 일정이 하루 차이로 어긋나면서 우리는 결국 파리에서도 못 만났다. 먼저 한국으로 돌어간 선배는 한국 돌아오면 꼭 연락하라 했고, 한 달 후에 우리는 서울의 어느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그렇게 우리는 3년 만에 만나게 됐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하다가 자연스레 여행 얘기로 넘어가면서 서로의 여행 이야기도 나누었다. 여행 이야기는 또 각자의 아픈 이야기들로 이어졌고. 어떠한 교류도 없다가 몇 년 만에 만난 건데 해 떠 있을 때 만나서 어둑한 밤이 될 때까지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생각보다 깊어졌고 우리는 그날을 계기로 자주 만나다 그렇게 친한 언니 동생 사이가 됐다.
선배는 내가 대학교 1학년에 들어왔을 때 3학년 선배였다. 똑단발에 그 당시 유행했던 살색 스키니를 자주 입었는데,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잘 어울렸던 사람이다. 학교 안에서 인사하면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는데 뭔가 따뜻한데 차분한 느낌이 차가운 거 같기도 하고. 멋있는데, 그래서인지 다가가기 힘든 선배였다. 거의 이름만 아는 느낌으로 지내다가 뒤늦게 선배랑 친해지고 알게 되면서 난 이제 선배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게 됐다. 참 건강한 사람. 건강하기 위해서는 행복이 제일 중요하고, 그 행복을 어디서 얻고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참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몸 건강은 물론이고 선배는 마음 건강에 더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의 건강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봐야 하는데, 사실 그게 매번 즐거운 일은 아니라는 게 어려운 포인트다. 가끔은 그렇게 해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에 더 힘들 때도 있듯이. 위안받고 마음 편하기 위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방법의 반칙도 있는데 선배는 절대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았다. 남과 비교하지 않으니 조급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속도를 지키는데 집중한다. 예전부터 멋있게 느껴진 건 그런 부분에서 나오는 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그게 어떤 일이든 대상이든 심지어 특정 시간이든. 자신의 기분도 끊임없이 살펴보면서 본인을 돌볼 줄 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에 대한 생각은 많이 해봤어도 내 기분이 어떤지 돌보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결국 그렇게 자기를 돌아볼 줄도, 돌볼 줄도 알고, 자기를 온전하게 아는 것만큼 건강한 게 있을까. 몸의 건강은 물론 마음의 건강도 약한 내 곁에 이렇게 건강한 친구가 있어 난 매일 더 건강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