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10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날, 하루 종일 와이키키 해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람 구경하다가 서핑도 하고, 엎드려 누워있다가 다시 서핑보드를 들고 바다로 나가기를 반복했다. 하루를 그렇게 보낸 후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대여한 서핑보드를 반납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그 사이에 노을이 예쁘게 번져있었다. 길 건너에 해변을 두고 멈춰 서서 노을을 보고 있는데 길을 걷던 사람들도 한 둘 멈춰 서더라. 그렇게 다 같이 가만히 서서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데 그때의 바람과 느낌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 같다.
'노을' 하면 떠오르는 날 중에, 패션 매거진에 다닐 때 사무실과 촬영장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한 날이었다. 사무실에서 일이 마무리되고 퇴근해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정면에 빌딩들 사이로 보이는 노을이 그날따라 유난히 붉었다. 정신없는 하루였지만 일이 재밌다고 느꼈던 하루, 이른 퇴근은 아니었지만 날 맞이해주는 노을을 보며 퇴근하는 길이 즐겁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오늘 하루 너무 좋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은 결국 다시 오지 않을 날이라는 생각을 하니 뿌듯하기도 하고 마음이 몽글몽글했던 퇴근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일의 마무리에 예쁜 노을을 봤고, 오늘 하루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행복하다’라는 말을 아껴 쓰는데 그날은 행복한 거 같다고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었다.
한때 내가 정말 사랑했던 꿈이었고 내 결정으로 그만뒀지만 한동안 마음이 많이 허했었다. 다시 매거진으로 돌아가면 되는 단순한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고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됐었다. 내가 아직 하고 싶은 게 맞는 건지, 단순히 내가 세운 계획을 위해서 오기로 돌아가려는 건 아닌지 스스로 잘 모르겠더라. 매거진에서 일할 때, 대학 동기 미겸이는 개성 강한 디자이너 브랜드의 디자인실에서 일했다. 미겸이 자체가 개성이 강하고 패션 취향이 확고한 친구라 그 브랜드에서 일하는 게 어울렸다. 많이 배우는 기회가 될 거고 언젠가 미겸이도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하고 특이한 브랜드를 차리겠지 생각했다. 미겸이도 난 에디터가 찰떡이라며 우리는 각자 목표하는 곳으로 가는 과정에 있었다. 같은 패션 분야다보니 일 관련 얘기도 많이 나누고, 누가누가 더 힘드나 겨루듯 서로 웃픈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며 연락을 자주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만뒀다고 연락이 왔다. 자기와 안 맞는 거 같다고 하더니 이후엔 스타일리스트 팀에서 일을 했다. 막상 스타일리스트 일을 한다고 하니 그것도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후에 또 그만뒀다는 거다. 막상 일을 했을 때 겉에서 보이는 것과 다른 것도 있었을 것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으니 다른 길을 계속 찾는 거뿐인데, 그때 난 실망감이 컸다. 그걸 난 실패라고 생각했고 실패자로 여겼었다. 그래서 그만뒀다는 연락이 올 때마다 화도 나고 나중에는 모진 소리도 했었는데, 사실은 그때 나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괜히 듣기 싫어했던 거다.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고 여겼을 때라 친구랑 같이 버텨나가고 싶은데 그런 동지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드니까 나도 못 버틸까봐 겁났던 거다. 그렇게 실패 또는 실패자라고 판단하고 오만했던 시간들을 돌아보면 미겸이에게 참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다.
매거진을 나온 후에 브랜드 하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아직 매거진에 있는 줄 알고 왔던 연락이지만 그 기회로 그 브랜드 일을 잠깐 돕게 됐었다. 친구의 브랜드는 외국 바이어들에게 급작스런 주목받기 시작했고 친구는 해외에서 몰려오는 연락들을 제대로 응답도 못하고 있었고 그 소통을 내가 잠시 도와주게 됐다. 바이어와의 미팅 자리가 주로 많았는데 한 번은 이태리 B 매거진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인터뷰 양식을 친구에게 한국말로 번역해주고, 친구가 완성한 인터뷰 문답을 다시 영어로 번역해서 매거진 측으로 전달해줬다. 일할 당시에 수많은 인터뷰 녹취 작업을 했었는데 그때 그 인터뷰의 질문들은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다양한 질문들로 이루어진 폭넓은 인터뷰, 어느 패션 매거진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인터뷰 질문들이 아니었다. 질문의 질이 달랐다. 미세하게 다른 시선에서 나오는 질문들에 감동했다. 높은 명성과 인정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매거진의 경쟁사가 내가 다닌 곳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괜히 벅찼다. 그만두고 나온 내 자신이 실패자처럼 느껴졌었는데 그 계기로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다. 이렇게 대단하고 멋진 곳에서 일했다는 자부심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잠시라도 이런 곳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게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다. 매거진 쪽에서 일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난 충분히 했으니깐. 하루는 라디오를 듣는데 디제이가 그런 말을 하더라. “이뤄지지 않는 사랑도 사랑이라 부르는데, 이뤄지지 않은 꿈은 왜 실패라고 부르냐.” 나는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실패라고 생각하며 내 자신을 실패자로 여겼을까. 마치 거대한 돌덩이 하나 안고는 내려놓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왜 그렇게 무겁게 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완성은 아니었을지라도 이뤄지지 않은 꿈도 아닌데.
대학교 때 소개받았던 친구가 있었다. 애초에 취향이 닮았다며 친구가 강제로 소개를 해줘서 인연이 됐는데 같은 전공자의 이 친구는 나와 관심사가 많이 닮아있었다. 막 학기 때 서로를 알게 되면서 진로를 놓고 고민을 나누면서 정이 들었었다. 그 친구는 디자이너와 에디터, 나는 바이어와 에디터를 놓고 고민을 하다 그 친구는 디자이너, 난 에디터를 택하게 됐다. 연락이 끊겼다가 각자 원하던 자리에서 다시 연락이 닿아 서로 소식을 나누게 됐는데, 앞날에 대한 고민을 같이 공유하던 친구라 그런지 더 반갑고 애틋했다. 서로 격려하며 쉬는 날에는 만나서 맥주 한잔하곤 했는데, 어느 날은 본인은 에디터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은 로망이 있다고 하더라. 결국 그 로망을 이루었고. 그만큼 에디터는 매력 있는 직업이 확실하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통해 에디터라는 직업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고 멋있는 여성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떠오르게 됐다. 유명 스타들과 화보 촬영을 하며 친분이 생기기도 하고, 모든 분야의 트렌드를 먼저 접하는 특권이 있으며 화려한 파티들이 항상 기다리고 있지만, 그런 화려함 뒤에는 낮과 밤의 경계가 없고, 각종 아이템들을 챙겨서 촬영 스튜디오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실상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고된 일이지만 그걸 감수하면서 할 만큼 에디터란 엄청나게 매력적인 직업은 맞다.
패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 가치관, 꿈 등 다양한 문화들을 접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는 게 패션 매거진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에게 패션은 좋아하는 건 맞지만 더 파고들고 싶은 건 문화 부분이었다. 트렌드의 흐름을 미리 파악하고 예측하고 접하고, 그 작업 자체가 너무 짜릿하고 희열을 느꼈지만 난 그게 꼭 패션이어야 했던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패션 자체보다는 어떠한 문화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을까. 패션 매거진에서 패션은 주제였을 뿐이고 그걸 표현하는 방식인 글에 더 매력을 느꼈던 건 아닐까. 이러한 걸 깨닫기 전까지는 마음이 참 무거웠다. 마음 어딘가에서는 네가 원하는 게 아니야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니 놓기가 무서웠다. 앞으로 달려 나가기만 하다가 속도를 잠시 늦추고 시선을 주변으로 좀 돌리니 여러 가지 모습으로 깨달음들이 오더라. 그런 기회로 내 안을 더 들여 볼 수 있었고. 패션 매거진을 다니는 남녀의 로맨스를 담은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가 한참 방영 중일 때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많이 왔다.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내 생각이 난다며. 그런 연락들로 씁쓸하고, 돌아가야 하나 고민이 됐던 시간들은 드라마가 끝날 때쯤 웃어넘길 수 있게 됐다. 에디터. 너무 자랑스럽던 내 첫 직업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는 거고, 내가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가치들을 알아보기 위해 거쳐간 과정의 일부였다. 실패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사랑했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