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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영 Oct 26. 2022

할아버지

하와이 8

  늦은 밤, 보통 통화하지 않는 시간대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집이냐며 할아버지가 다치셔서 응급실에 가셨다고 하는데, 내일 시간 되면 가까운 내가 한 번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히 그날은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어디 나가지 않고 하루 푹 집에서 쉬고 있었다. 밖이었다면 받지 않았을 수도 있는 전화를 받고 어쩌다 다치셨길래 이 시간에 응급실을 가신 건지, 지금 가봐야 되는 거 아니냐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얼마나 다치신 건지는 자세히 못 들었는데 할머니께서 혼자 모시고 가셨다 하니 마음에 걸린다는 엄마는 늦었는데 어떻게 가냐 했고 택시 타면 되지 뭘 걱정하냐고, 난 망설임이 없었다. 입고 있던 티에 널브러져 있던 찢어진 청바지를 받쳐 입고 난 바로 택시 타고 병원으로 갔다. 메르스 때문에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조차 복잡했다. 산만한 분위기 때문에 괜스레 긴장이 되고 불안했다. 겨우 들어간 응급실에서 찾은 할아버지는 피범벅으로 누워계셨고 심장박동 측정기에서는 ‘삐-’ 소리가 무섭게 울리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와 계셨던 고모부는 날 재빨리 거기서 델고 나오셨고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할아버지 장례식을 다 치른 후, 부모님은 부모님 댁으로 내려가셨고 난 내 집으로 왔다. 부모님은 혼자 있지 말고 며칠이라도 같이 있다 가라고 하셨지만 어차피 회사 가서 정리할 거 있다며 난 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면 며칠 동안 못 잔 잠을 몰아서 자게 될 줄 알았는데 잠도 잘 안 왔다. 며칠 있다가 회사로 출근을 했고 파트너 선배와 점심을 먹으며 난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남성잡지로 옮기냐에 대한 얘기도 나웠었고, 글과 패션 사이에 확신 없는 마음도 몇 번 얘기했던 터라, 이해해주셨고 받아들이셨다.


  직업 특성상 우리는 남들보다 두세 달은 먼저 살고 있었다. 본격적인 여름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됐지만 우리는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아직 할아버지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차 모르고 있는데 바쁘게, 심지어 남들보다 빠르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아무 일이지 않았고, 그렇게 돌아갔을 때 실수 안 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이 일을 완벽하게 하지 않는다면 안 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완벽주의가 됐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때가 잡지 마감 시기랑 겹쳐서 내가 갖고 있던 자료 중에 다음 호에 쓰일 자료들만 정리해서 넘겨주면 됐다. 며칠 나가서 정리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파트너 선배랑 오붓한 시간도 갖고 동료들과 마지막 밥을 먹고, 마지막 날에는 모든 짐을 챙긴 상태로 회의실에서 부장 선배랑 얘기를 나눴다. 일 하면서 어떤 점이 제일 힘들었냐고 물으셨지만 유일한 고충은 말씀드릴 수 없었다. 회의실을 나와서는 바로 옆에 있는 편집장실에서 편집장님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편집장님은 정말 그만두고 싶은 건지 쉬고 싶은 건지 이 기회에 잘 생각해보라며,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셨다. 후에 연락했을 때 정말 받아주실지 어쩔지는 모르는 거지만 그 말이 참 따뜻했다. 그렇게 편집장실을 마지막으로 난 회사를 나왔다.


  첫 출근했을 때만큼 마지막 퇴근했을 때의 기분도 생생하다. 조금의 후련함도 보태지 않고 그저 허무함. 허무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게 계속 뒤를 돌아보게 만들더라. 습했던 한여름인데 그날따라 저녁 바람이 서늘했다. 그대로 집 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진 않고.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결국 영화관으로 갔다. 개봉일만 기다리던 영화가 아직 상영 중이었고 시간도 맞아서 바로 티켓을 구매했다.


  영화 '라이드', 서핑과 삶에 관한 영화다. 매거진 다니면서도 마감하면 부산으로 곧장 내려가서 서핑했기에 기대가 컸던 영화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서핑을 시작한 주인공이 서핑에 흥미를 붙이면서 본인의 인생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그런 내용. 거기까지일 줄 알았는데 그 새로운 시각을 얻고는 본인이 붙들고 있는 것도 흘려보낼 줄 알게 된 주인공. 혼자 조용히 붙들고 있던, 그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그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장례식 이후로 운 적이 없었는데 가슴을 움켜잡고 정말 많이 울었다. 벽 쪽 자리여서 천만다행이었다.


  영화관에서 그렇게 펑펑 울고 집으로 돌아온 후 몇 주를 집에만 있었다. 외출이라 하면 물 사러 편의점 가는 정도. 집에만 있는 동안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10평 남짓되는 집 소파에 앉아서 정면에 보이는 책꽂이를 바라보며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거였다. 눈물도 안 났다. 낮잠을 잔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하루를 그렇게 아무 생각도 안 하면서 보냈다. 내가 기억하는 인생 시간 중에서는 처음으로 그렇게 있어 본 거 같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갖는 것. 언젠가부터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머릿속에 스위치라도 있으면 끄고 싶을 정도로 끊임없는 생각에 시달렸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잠을 설치는 나날이었는데. 정말 스위치가 꺼진 거처럼 아무 생각이 안 들다가 가끔 떠오르는 거라고는 할아버지였는데 슬펐다가도 금방 또 괜찮아지곤 했다. 괜찮다기보다는 그냥 멍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나 그때 괜히 나보고 병원에 가보라고 한건 아닌지, 괜히 가서 할아버지의 안 좋은 모습을 본 게 안 좋은 건 아닌지, 트라우마 같은 게 생긴 건 아닌지 후회 같은 말을 하지만, 난 내가 갈 수 있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 행동에 있어서 정말 후회하지 않는 일이다. 할아버지니까 내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달려갔지만 혹시나 내가 그때 안 갔더라면. 내가 가든 안 가든 변하는 건 없었겠지만, 만약 안 갔더라면 난 슬픔에 후회까지 더해져 오랫동안 괴로웠을 거 같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도 슬픔은 무뎌졌다. 그게 무서웠다. 괜찮지 않은 일인데 괜찮아진다는 게. 단순한 이별도, 가벼운 슬픔도 아닌데, 내가 아직 정상적인 일상생활로 돌아간 게 아닌데 무뎌지는 감정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것도 있다. 무뎌지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까 해서. 무뎌지는 건 잊는 행위 같았고 내가 사랑했던 할아버지를 그렇게 잊는다는 게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로 할아버지를 자주 떠올렸다.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든 모습을 자주 떠올렸는데 대부분 같이 살았을 때였다. 책상에 앉아서 신문을 보시던 모습, 졸음이 몰려오실 때까지 꿋꿋이 앉아서 뉴스를 보시던 모습, 서재의 컴퓨터 책상에서 숙제할 때면 옆 책상에 앉으셔서 다양한 봉투들과 서류를 정리하시던 모습, 외식하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부대찌개 드시는 걸 즐거워하시던 모습, 매주 일요일 아침에 산책 나가실 때 나한테 김밥 주문받으시던 모습.


  이런저런 모습들을 떠올리다 보니 유독 선명하게 기억되는 날이 있었다. 그 전 해 어버이날, 작은 화분을 사들고 할아버지를 찾아뵙던 날.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 중에 제일 행복해 보이셨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 때는 내가 좋아하는 걸 먹자고, 젊은이들은 뭘 좋아하냐고 물어보시곤 하셨지만 그날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하시더니 고급진 사시미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선생님, 오랜만에 오셨네요.”라고 인사하는 주방장님께도 할아버지는 손녀딸이 어버이날이라고 화분을 사 왔다고 자랑을 하셨다. 싱싱하고 맛있는 부위만 골라서 달라고 주문하시던 할아버지. 상대방이 너무 좋고 사랑스럽고 그럴 때는 내가 맛있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음식을 맛보게 하고 싶던데. 내가 그때는 회를 못 먹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그 값진 사시미들을 고추냉이 맛으로 누르며 대충 씹고 삼키는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연기하면서 먹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할아버지는 기뻐하셨다.


  이상하게 너무 행복해하시던 그 기억에 안 나던 눈물이 많이 나면서 뒤늦게 자주 울었다. 하지만 그 후로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믿을 수 없던 응급실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그렇게 행복하고 계속 활짝 웃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나도 그렇게 행복한 웃음을 짓는 일이 많길 바라시는 거처럼. 기억이라는 게 괴로울 때도 있겠지만 좋은 기억은 결국 후에 도움이 되는 거 같다. 그 기억엔 슬픔을 이기는 힘이 있었다. 위로도 있었고 치유도 있었고 아무튼 뭔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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