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9
사촌오빠의 결혼식 이틀 후에 나랑 동생만 남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이 기회에 하와이를 시작으로 한 달 동안 여행을 하게 됐다. 가족들과 헤어지고, 하와이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으로 나를 먼저 이동시키는 게 가장 시급했다. 불과 며칠 전에 예약해둔 숙소는 와이키키 해변 바로 앞, 오성급 호텔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바로 한 골목 뒤에 있는 호스텔이었다. 호스텔 앞까지 데려다준 사촌오빠와 새언니랑 인사를 나누고 조심하라는 오빠의 잔소리와 함께 마지막 보호자까지 보낸 후 우리는 새로운 숙소로 옮겨서 하와이에서 4일을 더 보냈다.
첫날은 일단 체크인 시간까지 주변 카페에서 아침을 먹으며 기다리다가 체크인 후, 짐을 일단 방에 두고 바로 다시 나와서 와이키키 해변을 구경했다. 길 하나만 건너면 해변이다 보니 수영복 입은 사람들과 바캉스룩을 입은 사람들이 거의 5 대 5 비율로 섞여있었다. 이제 좀 하와이 온 거 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산책하다가 유명한 치즈버거집에서 점심도 먹었다. 점심을 먹고는 미리 검색해둔 서핑 샵에 들렸다. 동생이 같이 있다 보니 간단한 서핑 강습을 다음날로 미리 예약해두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각자의 시간을 잠시 갖고 저녁에 다시 밖으로 나와서 저녁의 또 다른 흥겨운 분위기를 경험하며, 그렇게 쉬어가는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은 일찍부터 나가서 전날 미리 들렸던 서핑 샵으로 갔다. 보드에 왁스칠도 직접 하고 보드를 머리 위에 얹어서 들고 해변으로 나갔다. 해변가에서 몸을 가볍게 풀고 바로 바다로 들어갔다. 거의 반년만에 하는 서핑이었지만 몸의 기억은 잘 잊히지 않아서 금방 다시 쉽게 탔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 쪽에서부터 열심히 패들링 해서 몇 개의 파도를 제치고 바다로 나오면 고요해진 바다에 이르게 된다. 보드 위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멀리서부터 서서히 들어오는 파도들이 보이고 그중에 알맞은 파도를 골라 적당한 타이밍에 테이크 오프 해서 파도 위를 타는 것. 끊임없이 들어오는 파도들은 우리는 잘 관찰해서 잘 골라 타야 한다. 큰 파도일 줄 알았으나 그냥 흘러가는 물결 일 때가 있고, 지나가는 듯하다가 금세 크게 부서지는 파도가 있다. 그렇게 다가오는 파도에 집중하고, 혹여나 파도의 속도를 못 맞췄다면 그 파도는 지나간 걸로 보내고 또 다른 파도를 잡으면 된다.
서핑하면서 나의 제일 큰 문제는 패들링에서부터 시작됐다. 일단 바다로 나가면 파도도 잘 고르고, 테이크 오프도 잘했는데, 밀려오는 파도를 제치고 바다로 나가는 거에서 난 다른 사람들보다 힘을 많이 뺐다. 그렇게 꼴찌로 라인업까지 나가면 거기서 숨을 한참 고르면서 파도를 지켜봤다. 팔 힘이 너무 약해서 그런 문제를 느낀 나는 바다에서 도시로 돌아와 있을 때는 집중적으로 팔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까 파도를 제치고 나가는 게 이전보다 덜 버거워졌고, 바다로 나가는 속도도 제법 빨라졌다.
강습을 1년 받고 자유 서핑을 한 지 1년 됐을 때였다. 패들링은 이제 해결됐고, 오랜만에 자세교정 좀 받아야겠다 싶어서 그날은 코치를 받았다. 2시간 끝자락에 코치님이 부르길 ‘오늘의 파도’를 탔다. 그 파도는 내가 여태까지 탔던 중에 제일 높이 올라갔었는데 순간 아찔할 정도였다. 처음으로 그렇게 높은 파도를 타고나서 기분 최고인 상태로 그다음 테이크 오프 하는 순간 세탁기를 경험하고 허리 부상을 입었다. 물속에서 몇 바퀴를 돌고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나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보드 위에 올라갈 수도 없는 상태였고, 팔로 보드에 겨우 매달려있으니까 코치님이 끌고 나오셨다. 그 후로 한동안은 허리에 힘을 쓸 수가 없어서 스쿼트 자세도 못 하고, 서핑도 쉬었을 정도로 위험했다. 그 ‘오늘의 파도’와 내 허리를 맞바꿨던 경험도 했지만 나아지고 나서 난 또다시 바다를 찾아갔다.
서핑한다고 주말마다 바다를 찾아다녔을 때 친구들이 제일 많이 하던 질문은, 보드에 부딪혀서 멍이 들기도 하고, 바닥에 있던 돌에 긁혀서 발에 피날 때도 있고, 바다로 그렇게 힘들게 나가서는 결국 파도를 타고 들어오는 건 한 순간인데 그게 재밌냐는 질문이었다. 맞다. 힘들게 패들링 5분 해서 나가면 파도 타는 건 아마도 길면 1분이겠다. 하지만 그 한순간을 위해서 하는 거다. 파도와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위해서. 내가 그동안 보던 바다는 보드에 스탠드 업해서 파도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해본 후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바다가 됐다. 파도를 기다리고 파도와 같이 흐르고 파도를 타서 살짝 걷기도 하면서 정말 자연과 교감이 되는 건지, 다양한 상황에서 많은 걸 느끼게 해 줬었다.
흔히들 인생을 서핑에 많이 비유한다. 우리의 하루가 매일 다르듯이 바다도 매일 다르고, 큰 파도도 있고 작은 파도도 있고, 파도를 탈 때도 있고 놓칠 때도 있다고. 어차피 우리 인생은 중심을 잘 잡고 파도를 타는 것과 같은 거라고. 하지만 왜인지 우리는 바다를 보듯 인생을 바라보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아직 인생을 그렇게 보지 못 하고 있다. 바다에서 일상으로 왔을 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다양한 파도가 있듯이 우리도 삶에 있어서도 다양한 일들과 기회가 있을 터인데.
바다에서는 파도가 없다고 불평하지도 않고 파도를 제대로 못 탔다고 좌절하지도 않는다. 파도가 없는 장판인 날이면 고요한 바다인 그대로 시간을 즐기고, 좋은 파도를 놓쳤으면 “아 아깝다” 하고 아쉬움이 섞인 웃음을 남기고 다시 돌아서서 다음 파도를 기대하며 바다로 들어간다. 하지만 인생에서 나는 늘 불안함을 갖고 지내면서 자주 겁쟁이가 되고, 오래 주저앉아있다가 일어나서는 지나간 것을 계속 돌아보며 앞으로 불안하게 나아간다.
서핑을 끝내고 보드를 반납하고 다시 해변으로 걸어 나오면서 바다를 바라보듯 인생을 보자고, 서핑하듯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파도들을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기. 지나간 파도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다가올 파도에 집중하기. 서핑의 자세로 인생일 살아야겠다고 깨달은 후 난 한동안 바다를 가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