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불짜리 고양이 산후 조리원

내 치마가 고양이 놀이터가 된 마법 같은 날

by 할망

오묘한 집사님과의 인연은, 방파제에서 구조했던 아기 고양이의 마지막 순간에서 시작되었다.

SNS에 보호소에 있는 아기의 위독한 소식을 전한 날, 집사님은 “지금이라도 데려와 돌보겠다”고 연락을 주셨다. 하지만 그 결심을 실천하기도 전에 아이는 세상을 떠났고, 다음 날 집사님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아기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주셨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같은 결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그분은 제주 중문 곳곳에 급식소를 마련해 매일같이 고양이들의 끼니를 챙기고, 겨울이면 손수 만든 겨울집을 전해주신다. 길 위 생명들에게 보내는 그분의 마음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고, 따뜻하다.


고양이를 아끼고 보살피는 두 사람이 만난 자리이니, 자연스레 만남의 장소도 동네고양이에게 따뜻한 정을 내어주는 식당이 되었다. 오늘은 집사님이 추천해 주신 판포리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떤 고양이들이 살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식당 정보를 검색해보았지만, 인터넷 후기에는 ‘솥밥 맛집’이라는 평가만 가득하고, 식당의 SNS 계정에는 음식 사진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고양이 사진은 단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곳은 고양이들이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조용히 와서 밥을 먹고 쉬어가는, 평온한 공간이리라 짐작했다. 고양이들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아쉬움도 살짝 있었지만, 길 위의 삶을 살아가는 고양이들에게는 어쩌면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평안한 방식일지도 몰라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오늘은 소중한 인연, 고마운 집사님을 만나는 날이고, 고양이를 돌보는 공간이라면 가는 이유는 충분했다. 식당은 아늑한 단독주택을 정성스레 개조한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건물 앞에는 고양이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약속 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어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인사성이 밝은 강아지 가족이 "왈왈!" 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 소리 때문에 고양이들이 근처에 오지 않나 보다’ 싶어, "안녕! 나는 고양이를 찾고 있단다. 다음에 또 보자!" 인사를 건네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고양이 보러 왔다가, 강아지 가족의 환영 인사에 웃음꽃


사장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베란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늘 마음속으로 그리던, 얼굴 크고 당당한 ‘대장 고양이’ 풍모의 흰색 치즈 고양이였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욱 반가웠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다가가고 싶었지만, 혹시 식당에 실례가 될까 망설였다.

고양이와 눈을 맞추고 깜빡이며 인사를 나누던 그때, 사장님이 다가오셨다. “고양이 좋아하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네! 정말 좋아해요!”라고 답했다. 사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창문을 열어주셨다. “징징아, 고양이 좋아하는 누나 왔다!”

나를 향해 창가에서 눈을 맞춘, 대장 고양이 ‘찡찡이’의 환영 인사


“하하하! 이름이 징징이예요?” 웃음을 터뜨리니, “네. 하도 징징거려서요.” 라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이름만 들어도 녀석의 성격이 짐작되는 귀여운 이름이었다. 사장님은 고양이들이 지금은 낮잠 시간이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라며, 다른 아이들도 있다고 귀띔해주셨다.

“혹시 간식이나 장난감을 줘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여쭈니, “그럼요. 징징이는 간식 얻어먹으려고 여기 지키고 있는 거예요.” 사장님의 웃음 섞인 말에,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창가 옆 베란다에는 사기그릇에 사료와 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고양이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밥을 먹는 이곳 풍경을 상상하니, 식사 전인데도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그때 마침 집사님이 도착했고, 우리는 솥밥을 먹으며 고양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식사를 마칠 즈음, 고양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고, 식당에 손님들이 몰리기 전,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징징아, 누나 또 올게. 까까도 챙겨올게!”

간식 안 주면 징징! 수다쟁이 징징군과 식당 패밀리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징징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동통한 발로 마따따비를 끌어안던 징징이,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그러던 중, 예전 방파제 고양이 구조 때 인연을 맺은 천사 같은 부부가 며칠간 아픈 아기 고양이를 돌볼 임보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아기 고양이는 우연히 나를 통해 부부에게 인연이 닿은 아이였다. ‘이건 내가 꼭 도와야 해!’ 하는 마음으로 바로 제주행 비행기를 예매했다. 사실은 징징이와 고양이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또 다른 인연을 기다리는 중, 작은 눈망울 속에 우주만큼 큰 용기가 담긴 아기 고양이


2박 3일간 아기 고양이를 정성껏 돌본 뒤, 드디어 다시 판포리 식당을 찾았다. 이번에는 간식과 장난감을 한가득 안고 갔다. 사장님 부부는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양이 식구가 좀 늘었어요. 나가보시겠어요?”

창문을 열자 처음에는 고요했지만, 곧 왼쪽에서 “미야옹!”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따뜻한 햇살 아래 어미 고양이와 꼬물거리는 아기 고양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말없이 전해지는 그 평화로움에 마음까지 환해졌다.

따스한 햇살 아래, 검은 우산 그늘에 피어난 고양이 가족의 오후


사장님은 고양이들이 12일 간격으로 차례차례 아기를 낳았다며, 그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징징이의 형제 삼색이와 그녀의 딸 치타가 나란히 새 생명을 품었고,지금은 모녀가 함께 아기 고양이들을 돌보며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피붙이 모녀가 함께 육아를 나누는 그 모습은, 가족이라는 말로도 다 담기지 않을 만큼 따뜻하고 특별했다.


“영양가 높은 습식을 가져왔는데, 엄마 고양이들 먹여도 될까요?” 여쭈니,

“그럼요! 수유하느라 배가 자주 고픈 것 같더라고요. 고양이들하고 천천히 재미있게 놀고 계세요.”라고 따뜻하게 말씀하시고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셨다. 엄마 고양이들에게 영양 가득한 습식을 차려주고, 아기 고양이들에게는 부드러운 이유식을 그릇에 담아 주었다. 맛있게 다 먹은 엄마 고양이 치타는 그새 조용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엄마 삼색이가 아기들과 있었다.


삼색이에게도 육아의 스트레스를 잠시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기들과 놀아주려 낚싯대를 살랑살랑 흔들었는데, 정작 아기 고양이들은 내가 신고 있던 슬리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슬리퍼 하나를 내어주자, 세상을 다 가진 듯 신이 난 아기들은 그 위에 올라타고 뒹굴며 까르르 웃는 듯한 몸짓으로 뛰놀았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내 마음까지 말랑해졌다.

삼색이에게 조용히 마따따비를 건네며 속삭였다. “삼색아, 아기들은 언니한테 잠시 맡기고 편안하게 좀 쉬려무나.” 지친 몸과 마음이 잠시라도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마음이었다.

검은 우산 아래, 잠시 바람을 맡기고 쉼을 얻은 고양이 가족
초록 슬리퍼 하나면, 오늘도 대형 놀이동산 개장!


잠시 후 다시 나타난 남자 사장님께서 “치타가 안 보이네요?” 하고 물으셨다. 습식을 먹고 사라졌다고 말씀드리니 “아마 창고에 있을 거예요.” 하시며 직접 확인하러 가셨다.

“치타, 여기 있네요!” 사장님은 베란다에서 이어지는 창고 공간을 보여주며 “이곳이 산실이에요.”라고 말씀하셨다. 새끼를 낳기 전에 미리 이 조용하고 아늑한 창고 공간을 깨끗하게 치워 산실로 만들어 주셨다고 한다. 넓은 박스에 포근한 담요를 깔아주고, 고양이 화장실도 정성스레 마련되어 있었다. 모녀와 아기 고양이들이 함께 지내기에 부족함 없는 안락한 공간이었다.


보통의 엄마 고양이들은 출산 전에 스스로 산실로 사용할 안전한 장소를 오랜 시간 물색하고 다닌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여기에서 새끼를 낳으렴.”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곳을 선뜻 산실로 이용하는 고양이는 없다.사장님 부부가 보여주신 따뜻한 마음과 한결같은 보살핌 속에서 고양이들은 그들을 깊이 신뢰했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이곳을 소중한 생명이 태어날 보금자리로 선택한 것이다. 엄마 고양이가 이렇게 믿음직한 산실을 정했으니, 딸 치타는 더 알아볼 필요도 없이 엄마를 따라 이곳에서 편안하게 출산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곳은 모녀 고양이에게 백만 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산후조리원이었는지도 모른다.


치타는 삼색이의 막내로, 예정보다 이른 임신으로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처음엔 육아에 미숙해 삼색이에게 아기들을 맡기고 외출도 잦았지만, 지금은 한 마리 성숙한 어미로 성장해 있었다. 엄마와 딸이 서로 보살피며 공동 육아를 하고 있었다.

엄마와 딸,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동육아


사장님의 안내로 산실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는데, 그 순간 치타가 다가와 내 치마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기 고양이들도 우르르 몰려와 치마 구석구석을 냄새 맡고 탐색하더니, 이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오르락내리락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내 치마는 순식간에 ‘치마 놀이공원’이 되어버렸다. 사랑스럽고도 황홀한 풍경이었다.

치마 위 고양이들, 오늘만큼은 내가 놀이공원

아이고, 이 녀석들이 정말 이곳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구나!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쁘면서도,

한편으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걱정되는 세상’이라는 현실이 마음 한구석을 짓눌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걱정을 잠시 내려두고, 아기 고양이들의 인기몰이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밤새도록 이 ‘치마 놀이공원’을 운영해주고 싶었지만, 곧 식당이 점심 손님들로 바빠질 시간이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놀이공원의 종료를 알리며 일어났다.

슬리퍼 정류장에서 치마 놀이공원까지, 아기 고양이들은 대모험 중

아기 고양이들은 “미야옹! 미야옹!” 하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투정부리는 아이들 같았다.

창틀 앞 아기 고양이 시위대: “야옹! 다시 입장시켜라옹!”


밖으로 나오니 고양이들은 슬리퍼를 가지고 놀고, 우산 손잡이를 베고 자고, 저마다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낮잠 예약 완료! 슬리퍼, 우산손잡이 1인용 객실입니다.


그제야 문득 생각났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징징이! 요즘은 조카 고양이들이 많아진 이후 외출이 잦아졌다고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걸까.

“징징아, 누나가 까까랑 마따따비 선물 놓고 간다. 다음에 꼭 만나자, 알았지?”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고양이들에게 마음을 두고 돌아왔다.


※ 이 이야기는 제주 **‘판포미인’**을 배경으로 쓰였습니다.


<다음 이야기>

어느 날, 판포의 베란다에 낯선 구조물이 등장했습니다. 해녀의 테왁을 닮은 고양이 해먹.

그것은 자라는 생명을 위해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사람의 다정한 발명이었지요.


� [다음 이야기: 고양이를 위한 발명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양이 전망대를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