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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Nov 25. 2021

야생의 맛 그리고 배달앱의 공포

글 쓰는 바리스타



재즈의 선율이 흐르는 카페에 우아하게 앉아 모닝커피를 한 모금 음미하며 책을 읽는 여유로운 일은 상상 속에 넣어 두어야겠다.


며칠 일을 익히고 나서 일주일에 두 번은 마감시간, 두 번은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 일을 하게 되었다. 카페는 전반적으로 점심식사 후에 손님이 가장 많다. 우리 카페도 오후 12시부터 2시 사이가 가장 바쁘다.

 

오전 시간부터 일을 하게 된 어느 날 사장님이 잠깐 볼일이 있다고 외출을 했다. 11시까지 오겠다던 사장님은 12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손님들은 점점 많아지고 줄까지 서게 되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들었다. 메뉴도 익숙하지 않아서 용량을 제대로 맞췄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가장 복잡한 메뉴 주문이 들어왔다.


심호흡을 하며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자그마치 9개의 재료를 각각의 용량으로 넣고 믹서에 간 다음 토핑까지 올려야 하는 메뉴였다. 저울로 용량을 정확히 재야 하는 것이라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모양은 그럴듯했다. 맛도 만족스러웠기를.     


1시간도 안되어서 카페는 금방 한가해졌다. 주방에만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장님은 마침 손님 물결이 싹 빠져나간 뒤 나타났다. 볼 일이 늦어져 미안하다며,


'야생의 맛을 보셨군요.’ 한다.


설마 일부러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사장님 말대로 그렇게 야생의 맛을 보고 나니 자신감이 붙긴 했다. 이제 뭐든 잘 해낼 것만 같다. 배달 앱의 ‘딩동’ 소리에만 잘 적응한다면.     


요즘도 길을 가다가 ‘딩동’하는 알림 음을 듣게 되면 깜짝깜짝 놀란다. 카페에서 손님의 휴대폰에 알림 음이 ‘딩동’이면 또 깜짝 놀란다. 이 소리는 배달 앱에 주문이 들어올 때 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너무 한가해서 이거 먹고살겠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 예고도 없이 갑자기 ‘딩동’ ‘배달 주문입니다.’ ‘배달 주문입니다.’ 하고 포스에서 안내음이 울렸다.

허둥지둥 됐다.

안내음은 확인을 할 때까지 몇 번이고 빠르게 반복됐다. 주문을 확인하고 접수 버튼을 눌렀다. 배달 바이크를 다시 접수한 다음에 음료를 준비해야 했다. 음료를 준비하려고 할 때 갑자기 한가하던 카페에 손님이 들이닥쳤다.


혼돈 속에서 나는 배달 음료를 먼저 준비할 것인가? 홀에 온 손님의 음료를 먼저 준비할 것인가 갈등에 빠졌다. 일단 홀에 온 손님의 주문을 받고 배달 음료를 준비해서 포장해 놓은 다음 홀 손님의 음료를 준비했다.


이럴 땐 집중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카페의 손님은 예고 없이 몰려왔다가 한 순간에 한가해지기도 한다. 바이크 배달원이 와서 픽업해 간 뒤 ‘배달완료요’라는 안내음이 울리고, 테이크아웃 손님도 가고 나면 그제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배달은 주문 뒤 바로 배달원이 잡히기도 하는데 바쁜 시간에는 30분 이상이 지나도 잡히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음료 만들 타이밍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콜이 뜨면 음료를 만들기 시작하면 되는데 너무 빨리 오는 경우도 있어서 대부분 접수를 하고 나서 슬슬 준비를 다. 콜이 너무 잡히지 않을 때는 업체에 전화를 넣어야 했다. 바로바로 처리되지 않을 때 초조하게 기다리는 마음이 어려웠다. 냉장고에 준비해 놓은 음료가 녹지나 않을까 마음속으로 애를 태우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한 달째, 아직도 서툰 솜씨에 긴장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출근할 때면 마음을 안정시키고 뇌의 활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준다는 ‘안정액’이라도 사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사람을 만나는

카페에서의 시간은 내 삶을 활기차게 하고 있다.

 

카페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 가면 힘들지만 집안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카페에서 구석구석 닦던 것이 생각나 집안 청소도 더 열심히 하게 됐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다 귀찮을 수도 있지만 나는 활기가 더 넘쳐 가족들에게도 더 밝게 대했다. 일이 몸에 활력을 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금이 두툼하게 담긴 첫 월급봉투는 그동안 모든 어려움을 웃어넘길 수 있게 해 주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남편과 아이들에게 용돈을 조금씩 주고 나머지는 저금을 했다.      


사장님은 현금을 넣은 봉투에 따뜻한 격려의 말과 함께 열정적으로 일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열정적'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뜨겁게 했다. 정말 열심히 잘 해냈다는 것이 기뻤다.


언젠가 본 적 있는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떠오른다.

대기업의 부장님도 쩔쩔매게 만드는 ‘슈퍼갑 계약직’인 비정규직 미스 김이 주인공인  드라마였다.

미스 김은 계약직이면서도 정규직들이 어려워서 못하는 일을 척척해내며, 회사에 얽매이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일만 당당하게 해낸다.

그녀는 유명한 게장의 달인을 섭외하는가 하면 부장님도 못 해낸 어려운 계약을 따 내기도 한다. 위기에 처한 신입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또한 그녀밖에 없다.     


아직은 서툴지만 언젠가는 음료의 이름만 들으면 의식의 흐름대로 몸이 알아서 만들어 내고 카페에 줄을 선 손님들을 침착하게 맞이하며 복잡한 음료를 척척 만들어 내는 알바의 신이 되고 싶다.


내가 맞이하는 손님에게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 주고, 마음까지 살피는 따뜻한 카페를 만들고 싶다.    

       

커피는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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