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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May 10. 2022

마지막 주문

카페 아르바이트


토요일 오후 2시 20분,

알람이 울리고  나는 휴대폰에서 그 시간을 지운다.

오늘이 마지막 카페 근무다.



집을 나와 자줏빛 철쭉이 가득 피어 난 회전교차로를 건너 커피 볶는 냄새로 가득 찬 로스팅 카페 앞지나면 다정한 떡볶이집과 두부집이 있고 그 앞에 내가 일하는 카페가 있다. 카페는 언제나처럼 한가로웠고 아지트가 없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지인들이 찾아와 주었다.  이곳에서의  내가 만들어 주는 마지막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바닐라라테 아이스로 한잔 주세요."

이 말이 내가 지금 카페에서 받는 마지막 주문이 되었다. 카페의 주인이 바뀌고 5월부터 새단장을 한다.


바닐라라테 아이스


첫 주문을 받은 것이 어느덧 1년 전의 일이 되었다. 봄에 시작한 커피와의 시간이 사계절을 지나 막을 내린다. 커피는 나에게 많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선뜻 내어 주었다. 앞치마에는 지나간 추억들이 커피 향기와 함께 베여있다. 카페에 일 하러 나오는 시간이 활력이 되어 주었고 글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었고 글을 쓸 수 있는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라인더에서 커피가 갈려져 내려오는 소리, 커피 머신에 포터 필터를 장착하는 그립감, 가늘게 떨어지는 커피 줄기를 바라보며 뿌듯해하던 시간, 스팀 소리에 귀 기울이고 손을 떨면서 하트를 그리던 시간, 못난이 하트에도 예쁘다고 감탄해 주던 사람들, 격려와 시랑을 아끼지 않던 손님들과 함께 아쉬움을 남기며 문을 닫는다. 커피가 더 알고 싶고 좋아지는 시간, 마지막으로 바닐라라테를 주문받으며 내 앞에 새롭게 다가올  달콤한 일들을 기대해 본다. 


다시, 카페 출근


이제 카페에 일하러 가지 않는다


'동경하던 것이 이루어지면 때론 힘든 현실이 되기도 하니까'라는 핑계를 되며 전 사장님이 카페를 인수해 볼 생각이 있냐고 말했을 때


"아닙니다. 돈이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돈도 없다. 어떻게든 끌어모아 어찌어찌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월세와 함께 드는 비용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매일매일 일 할 자신도 없었다. 며칠은 고민을 좀 했다.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십 대에나 할 철없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정리하고 나니 경험해 보고 싶은 일들이 눈앞에 쏟아졌다. 배우고 싶은 강의를 들으며 오전에는 방역 아르바이트를 했다. 베이비부머센터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교육에 참여하고, 도서관 그림책 글쓰기 워크숍,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책방이나 미술관, 문학관 등 좋은 공간들도 찾아 나섰다.

신이 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금세 지쳐버리기도 했다. 매일 다른 일들에 참여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새롭게 도전하고, 배우고, 만들어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잘 마치면 보람차고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결과를 내기까지 쏟아부어야 하는 시간과 힘이 필요했다.


오디션을 몇 백번씩 보다가 겨우 배역 하나를 맡게 되는 배우들이 생각났다. 새로운 무대에 새로운 역할로 서며 얼마나 긴장하고 떨렸을까? 떨어지면 얼마나 낙심했을까? 여러 번 하다 보면 무렇지 않게 적응하게 될까? 아니면 더 지쳐서 더 이상 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아 이제는 유명 배우가 된 이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얼마 전 종영 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히로인 배우 강기영이 떠올랐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감초 연기로 베스트 조연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번 드라마로 시청자게 게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었다. 알고 보니 오디션을 백번도 넘게 보았다고 한다. 


교육과 일이 없는 시간에는 여전히 하루 중 일정 부분 카페에서 보낸다. 예전에는 한 곳을 단골처럼 드나드는 것을 좋아했다면 요즘은 새로운 카페를 탐색하는 재미에 빠졌다. 

주인이 바뀐 카페가 새롭게 문을 열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골목길을 지나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옛 직장이었던 곳을 다시 찾았다. 일 할 때 단골손님이었던 앞 건물의 두부가게 사장님도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다. 국산콩으로 두부를 직접 만들고, 콩국물과 콩으로 만든 국수를 파는 두부마을은 언제나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나도 콩국물과 두부를 샀다. 사장님한테 단골 시절 즐겨 드시던 바닐라라테를 사드리고 싶었는데 카페가 문을 열자마자 벌써 한 잔 드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서로 팔아주고, 대접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옷가게 사장님은 손님이 오면 팥빙수를 꼭 주문했고, 떡볶이집 사장님도 아침에는 꼭 라테를 한 잔 마셨다. 인심이 좋은 골목이었다. 카페의 새로운 사장님은 아침 서비스로 토스트를 내놓았다. 손수 만든 오렌지 쨈이 달콤했다. 허브를 키우는 미니 스마트팜 식물재배기도 인상적이었다. 인심 좋은 골목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카페의 새로운 사장님을 보니 조금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길을 가야지. 이제 새로운 탐색의 재미를 느끼고 글을 쓰기 위해 다양한 카페로 출근한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한 행보. 곳곳에 멋진 공간과 풍경을 가진 장소들은 나를 한 곳에만 머물 수가 없게 했다. 색다른 카페를 인터넷에서 찾거나,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색다른 카페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저마다의 개성을 담아 자신을 표현하는 공간들 속에서 나를 표현하는 방법들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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