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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Good Oct 29. 2020

괜찮아. 이대로 충분하니까!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은, 또 누군가 에게 무언가를 팔거나 제공하거나 서비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가 그렇듯, 내가 무언가를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에 따른 경제적인 이득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동안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 돈을 벌기 위함도 있고, 어떤 이는 직업을 통한 보람을 갖는 다고도 한다. 이유가 어찌 되었던 결국 우리는 평생을 끊임없이 누군가 에게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무엇이든 계속해서 타인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하는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만약, 누군가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화가 나거나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더라도 내심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정작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정말 이게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일인가 할정도로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경우에도 우리는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행동에 대한 나의 내면의 침묵. 


알고서도 침묵하는 것일까? 아니면 알지도 못하고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유행을 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법 에서부터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과 글들이 난무(?)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방법을 찾았는가?


'자존감'을 NAVER에서 찾아보니 몇 가지 정의가 보인다. 


'자아 존중감' 이거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자신 스스로에게서 무시받고 있다거나, 심지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어떨까?


존중하거나 사랑해야 할 '자신', 자신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 말이다. 


존중하고 사랑할 대상을 인식해야, 미워하든, 사랑하든, 존중하든 할 것 아니냔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내 깊숙한 '무의식'에 가두어 놓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무의식은 우리가 평소에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은 아니므로 실제로 평소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의식보다 더 더 무섭게 우리 현재의 생각과 인식을 조정할 수 있다.


내가 내 자신을 학대하거나 무시하고 부정하는 행위 들은 내가 실제로 그런 상태를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결국 우리 내면으로 들어가 나의 의식 저 깊은 곳에 나의 무의식의 '패턴'으로 저장될 것이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게 하고 있다면 '무의식'의 '패턴'에 의해 자연스레 저장된 것들이 우리의 '의식'으로 올라오는 것일 것이고,              


심지어 인식하고 있는 중에도 계속해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면, 이는 이미 내 '무의식'에 그런 의식의 패턴을 내 스스로 인정해 버리고 허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데, 나를 위해서 할 수 없는 일.


그렇게 사람들은 사랑과 존중에 늘 '타인'을 두다 보니, 정작 '나'라는 존재는 늘 뒷전이 된다.


자존감은 나를 위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남을 위해 의식적인 행동들에 파묻히다 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의 중심을 잃게 되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내 존재는 내 감정의 쓰레기 통에 불과한 존재가 돼버릴 수 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내가 나도 모르게 쌓아온 나쁜 감정과 방향의 패턴으로 내가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무의식은 보이지 않지만, 알지 못하면 평생 볼 수 없는 우리 안에 가장 큰 '나' 다.


사람들 사이에 없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떠드는 그룹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에 느끼는 외로움은, 나를 위로해주고 나를 격려해줄 '내'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 맞춰지다 보면 정작 '나' 홀로 스스로 안정적인 감정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나도 자연스럽게 어떤 일을 하거나, 행동할 때의 아쉬움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아 난 왜 그러지?' '아 이럴 줄 알았어!'하고 무수하게 나를 비난하는 말들이 쏟아지게 된다.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을 상대하거나, 어떤 일을 행할 때, 뭔가 나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 누구보다 더 나는 나 자신에게 더 응원해주고 더 격려를 해줘야 함에도 저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내 머릿속을 지나 자연스레 입으로 튀어나오게 된다는 것이다.ㅠㅠ               


이런 일들이 많아지고 쌓이다 보면 보이지 않는 사이에 나와 나의 사이는 멀어진다. 가장 나를 이해해주고, 친구가 되어줄 나와 멀어진다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 남이 원하는 걸 쫓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래서 요즘은 아주 짧은 순간 저런 생각이 스쳐갈 때, 내 스스로 한마디 내뱉는 말이 있다.


'괜찮아' '그래 지금 이대로 충분해' '잘했어'라고 말이다.                              


그럼 조금은 제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존재 로서의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잘못된 게 있다면 고치고 재정비해야지만, 무조건적인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이나 후회는 결국 나를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지만,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존재 자체로 모든 것이다. 사랑이고, 기쁨이고, 행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스스로에게 '괜찮아' '지금 모습으로 충분해'라고 말해줘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위해 '선물 '을 해야 한다면서 쇼핑을 하고, 여행을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한다. '돈'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쇼핑하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조차


'당신은 괜찮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충분하다'


그것이 언제나 우리의 삶의 시작이면 좋겠다. 오늘 아침의 시작. 매년 1월 1일의 시작.              

그리고 오늘 하루에도 수없이 지나치게 될 매 순간의 시작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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