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기억을 쌓아가는 과정일지도.
삶의 과정들은 자신에게 또 누군가에게 기억을 만든다. 아주 어린 날의 기억은 그냥 제쳐두고서라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독립적이고 고유한 한 사람으로서 삶의 기억은 중학교 무렵부터로 보면 될까? 주어지는 환경과 자의식의 관계. 자의식의 선택. 선택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몫으로 안고 가야만 했던 무수한 일들.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끼어드는 예기치 않은 숱한 삶의 불청객. 지나고 보면 삶의 불청객과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 몫이었던 것들이 자신을 더 많이 키웠다는 기억이 되는 것. 기억이 불온전하여 다행이다. 삶의 단락마다 불필요한, 무의미한 단락이 없었다고 기억이 말해주니 다행이다.
기억은 완전하지도 온전하지도 않다. 사람에 따라 종종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같은 경험 속에 있었는데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이 꼭 맞아 떨어 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기억을 두고 맞다 틀리다 주장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나보다 나의 지난날을 나와 함께했던 누군가가 더 잘 기억하고 있을지도.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지난날이 누군가에 의해 소환되고 우리는 기억 속을 여행한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어가는 일은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기억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임을 느낀다. 기억이 소중해지는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기억이 자신이 되는 시간이다. 내 젊은 날에 '기억'이라는 낱말은 어느 언저리에 짱박아두었다. 누군가와 기억을 견주자면 이겨본 적이 없다. 오히려 기억 못 하는 나자신이 좋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이가 들면서 기억과 무관했던 일들이 가끔, 불쑥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떠오른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더욱 또렷해짐을 느낀다. 태어남이라는 처음과 죽음이라는 끝은 부모님이라는 원형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까치 까치설날 아침, 문득 날아든 문자 하나. 10년 전에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민서. 9살 꼬마였던 민서가 고3 입시를 마치고 스무 살 성인이 되어 유아교육과에 입학한다는 반가운 소식. 그녀의 기억 속에 내가 '사랑과 따듯함'이라니 다행이다. 쓸데없이 또 눈가가 촉촉해져서 기억의 파편 속을 헤맨다. 그러다 지난 스승의 날 그녀의 문자도 찾아보았다. '선생님께서 늘 반 친구들에게 너희가 너무 좋아라고 말씀해 주신 것을 시작으로 친구들과 수박화채를 만들고...'라는 문장에 머물며 안도한다. '아! 그때 그랬구나.' '다행이다. 사랑이 많았구나! 다행이다!' 내 기억 속에 수박화채는 까마득히 없는데 누군가의 기억으로 내 기억이 더 다채로워졌다. 지금은 없어진 '새미학습 일본어 공부'도 기억 속에서 춤춘다. 저녁에 화상으로 만났던 일본어수업반 아이들. 엄마가 일본인인 아이, 일본만화에 관심이 많은 아이, 민서처럼 내가 하는 일이면 무조건 참여하는 아이들까지. 그렇게 2년 남짓 화상수업이 이어졌었나...
나의 지난날을 누군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두려운 일일 수 있다. 누구나 부끄러운 기억, 지우고 싶은 기억 몇 개쯤 갖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기억은 그때의 자기 자신이다. 부끄러웠든 지우고 싶든 그 모든 과정은 내 삶의 과정이니 소중한 기억들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 스스로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것. 나중에, 삶의 해 질 녘에 섰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던 기억들이 많아서 가슴이 따듯해지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