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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로시 Jun 05. 2020

어느새 여름

가지각색의 꽃향기를 한 아름 품고 베란다 창문으로 살며시 들어왔던 선선한 봄바람이 이제는 뜨거운 바람만이 내 얼굴에 스쳐 지나가면서 송골송골 땀방울을 남겨두고 다시 베란다 창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또다시 들어옴을 반복한다. 아직 봄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내게 이제 여름이라고 알려주는 전령처럼 뜨거운 바람은 연신 나의 얼굴에 와 닿고 있었다. " 그래 이제 정말 여름이네~!" 아직 옷장의 옷들은 여름을 맞을 준비가 되지 못했는데. 나 역시 아직 긴팔의 옷과 긴바지를 입고 있는데.


옷장의 옷들을 모두 꺼내 겨울옷과 긴팔의 옷들을 압축팩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겨울 내내 나에게 따뜻함을 주었던 옷들을 잘 개어서 압축팩에 차곡차곡 넣다 보니 금세 압축 백에는 옷가지들로 가득했다. 압축 백 지퍼를 꾹꾹 눌려 닫고 청소기로 압축 백의 공기를 빼내어 납작하게 압축시켰다. 그렇게 3개의 압축 백이 만들어졌고 드레스룸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그리고 겨울 내내 압축되어 있던 여름옷을 하나둘 꺼내 긴 원피스는 옷걸이에 걸어 놓고, 반바지와 여름 청바지들은 한쪽 구석에 개어 놓았다. 남편 옷도 옷걸이에 걸어야 될 옷들과 바닥에 놓일 옷들로 분리해서 정리했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옷방 정리가 끝이 났다. 요즘에는 계절에 속도를 잘 쫒아가지 못하고 있다. 봄이 온 것도 베란다 창문으로 보였던 산수유꽃을 보고 "아 봄이구나"라고 알아채리고, 딱 기분 좋은 선선한 봄바람이 봄이 왔다고 봄꽃들의 향기를 가득 안고 나에게 왔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쁘든 슬프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겨울은 가고 봄이 오고 봄이 가고 또다시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계절은 변함없이 꿋꿋이 가고 오고 를 반복하고 있다. 바닥을 뚫고 들어 갈 만큼 무기력했던 하루도 다음날에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굳은 의지와 만나 하늘을 찌르듯한 자신감으로 똘돌 뭉친 하루가 되기도 하고, 뭘 해도 잘되던 하루가 뭘 해도 안 되는 하루가 되기도 하는 나의 시간들이 계절의 변화와 닮아 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면 시원한 가을이 온다.


겨울과 여름은 나에게 달갑지 않은 계절이다. 누군가에게는 겨울과 여름이 최고의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일들이 나를 괴롭힐 때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겨울과 여름은 나에게 그런 계절이다. 빨리 겨울이 지나 봄이 되기를, 빨리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기를 기다린다.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8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겨울에는 눈으로 뒤덮여 영하의 추위에 손발이 동상에 걸려 몇 날 며칠을 고생하기도 하고, 여름에는 많은 비로 집안에 물이 나의 무릎까지 들어와 옷가지들과 책들이 빗물의 횡포에 당하기 일쑤였다. 꼬꼬마 시절 나에게 겨울과 여름은 달갑지 않은 계절로 기억이 되었고 어른이 된 지금 역시 겨울과 여름은 달갑지 않다.


그래도 어김없이 나에게 겨울은 오고, 여름이 온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금 나는 여름을 마주하고 있다. 그냥 살다 보면 살아지듯이 여름이 왔구나 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여름과 그냥 살아가고 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시원 가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오늘도 그냥저냥 살아간다.



걱정의 실체는 정제되지 않은 자잘한 잡생각에 가까워요. 앞 뒤 순서도 없고 논리와도 거리가 멀죠. 그래서 일단 걱정을 시작하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로 넘어가서 방황하기도 해요.


- 이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 책 내용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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