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여인 덕혜옹주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돌담을 넘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로 향했다. 정식 명칭은 이왕가 소백 작가 어결혼 봉축 기념비다. 쓰시마 번주의 후손인 다케유키 백작과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1931년 대마도에 거주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을 모아 세운 기념비다. 이혼 후 현지인들에 의해 철거돼 방치되다가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증가하자 2001년 지금의 가네이시성 정원 인근에 세워졌다.
후궁에게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고종 승하 후 일제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간다. 여성학습원에 다녔을 당시 덕혜옹주는 늘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일본인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늘 그녀 옆에는 불안이 함께 따라다녔다. 공부만 끝나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녀는 힘든 유학생활을 버티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대마도 번주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까지 해야 했다. 결혼을 하고 그다음 해 정해를 출산했다. 영어 학자이자 시인인 그녀의 남편 소 다케유키와 잠시나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은 늘 그녀와 함께 했다. 고종의 죽음과 생모 양 씨의 죽음은 이국땅에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덕혜옹주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었을 거다. 슬픔, 분노,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덕혜옹주는 견딜 수 있는 힘이 사라지고, 정신병을 앓게 되었다. 남편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어 정신병원을 드나들 게된다. 1955년 6월 덕혜옹주 측의 요구로 이혼 하게 되고, 1956년 일본인과 결혼했던 딸이 실종된다. 1962년 1월 덕혜옹주는 우리나라로 귀국해 요양하면서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우리가 마주한 팔월이 먹먹해지고 있었다. 고종은 환갑에 얻은 늦둥이 딸 덕혜를 이뻐했다. 5살 덕혜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만들어 동년배 5~6명을 함께 다니게 했다. 고종은 매일 덕혜와 함께 했으며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금지옥엽 키우던 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 모습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역사 속 이야기에서 만나는 별 볼 일 없었던 나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데.
셀 수없이 수많은 먹먹한 계절을 지나온 그녀의 이야기에 모두가 침묵한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기에. 그 아픔을 그 한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나무그늘에 잠시 숨을 고른다. 목마름을 말하는 민이한테 생수병을 건넨다. 몇 모금 마시고 남은 물을 나에게 준다. 내 몫을 남겨주는 민이의 섬세함에 미소가 번졌다. 남은 물을 몽땅 마시고 푸름을 뽐내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뜨거운 햇살에 굴하지 않고 싱그러움을 뱉어내는 나뭇잎의 기상이 대단하다. 고집스럽게 내리쬐는 해살에 눈살을 찌푸리는 민이 얼굴에 손선풍기를 보낸다. 선선한 바람이 얼굴에 닿으니 두 눈을 감는다. 기분이 좋다는 말이다. 계속 손선풍기로 더위를 식혀 달라는 말이기도 하다. 한동안 땀을 식히고, 숨을 골랐다. 먹먹해지던 계절이 옅어졌다. 우리는 천천히 덕혜옹주 이야기 속에서 나왔다. 저녁에 무엇을 먹을 것인지. 일본 라멘은 점심에 먹었으니 저녁은 야키니쿠로 먹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오간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티아라 쇼핑몰에 한번 더 들려 기념품을 사야겠다는 말과 드럭스샵에서 구매할 목록들을 손가락을 접어 가며 말하고 있는 우리.
팔월의 햇살은 빛났고, 우리의 빛나는 계절은 먹먹한 계절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걸어왔던 길을 따라 다시 돌담 밖으로 향해 걸었다. 고요한 물소리가 들린다. 들리듯 말 듯 흐르는 얕은 도랑에 잠시 멈췄다. 뒤 돌아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다시 바라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그곳을 바라본다. 먹먹한 계절을 지나왔을 어여쁜 여인을 기억한다. 이국땅에서 만난 나의 한국인의 이야기를 기억에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