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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이 나타났다, 아주 많이

by 함지연

이사를 한 후, 아직 미용실에 정착하지 못했다. 집에서 가깝고 시술비가 합리적인 곳을 찾는 중이다. 머리를 손질할 시기가 되어 고민했다. 후기 좋은 미용실을 검색하고 찾아가 볼까, 산책 삼아 골목을 걷다가 끌리는 대로 들어가 볼까, 아니면 지난번에 시술을 했던 곳을 재방문할까.


오래 고민하지 않고 지난번에 갔던 미용실을 한번 더 가기로 결정했다. 일단 집에서 가깝다. 천천히 걸어도 5분. 지난번에도 로트를 말고 보자기를 뒤집어쓴 후, 집으로 와서 쉬다가 중화를 하러 갔었다. 평소에도 미용실 앞을 자주 지나쳤는데, 출입문 앞에 화분이 항상 많았다. 라일락과 달개비와 스킨답서스, 철쭉과 나리꽃, 국화 등 각종 계절 꽃들.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그 앞에서 화분에 물을 주거나 분갈이를 하거나 가지를 정리하는 주인을 종종 본다. 뽀글뽀글 볶은 긴 머리의 60대 주인. 번화가가 아닌 주택가 골목에 있는 오래된 미용실. 몇십 년 된 단골들이 찾는 미용실은 이 동네에서만 30년째 문을 열고 영업 중이다.


이제 손님들이 염색을 할 때가 됐는지, 커트를 할 때가 됐는지 짐작 가능하고, 대소사나 기저질환까지 공유하는 편안한 관계. 오가며 들러 떡 한 조각을 두고 가기도 하고 주인이 오래 가게를 비울 때면 단골 중 누군가가 일부러 찾아와서 미용실 앞의 화분들에 물을 흠뻑 뿌린다.


마침 가게 안에 주인만 혼자 있어서 곧바로 머리를 말기 시작했다. 볼륨을 낮춘 티브이가 켜진 작은 미용실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내게 어떤 일을 하냐고 묻는 주인에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실은 얼마 전, 책도 출간했다고도 고백했다. 한참 머리를 말던 주인은 탄성을 질렀다. 어머나 어머나. 작가라니 대단해요, 책이라니 대단해요. 그러더니 갑자기 시술을 멈추고 휴대폰으로 내 이름과 책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주인은 내 책을 구입해서 꼭 읽겠다고 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 못한 독자를 만나다니. 곧 책 한 권이 추가 판매될 예정입니다.


나의 단독 에세이는 출간된 지 이제 막 한 달이 넘었다. 인쇄소에서 책을 받았을 때의 흥분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독립출판으로 책을 출간하고, 대형 서점에 입고하는 과정, 인디펍과 런닝북과 유통 계약을 하는 과정 등은 이 세계가 낯설고 생소한 내게는 힘들었던 일이었다. 한꺼번에 어려운 일을 처리해 나가느라 무리를 했는지 실핏줄이 두 번이나 터져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다녔다.


책이 너무 많이 팔리면 어쩌나 하는 행복한 착각은 한 달이 지나며 차츰 식었다. 그렇긴 해도 편집과 디자인, 삽화로 쓰인 사진까지 혼자 힘으로 해낸 책이라 애정은 깊은데 개인이 만든 독립출판물은 홍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독자의 입장일 때는 몰랐던 서점의 세계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매대 가격이 얼마였더라, 인터넷 서점 팝업 광고비용은 또 얼마더라, 서평단을 하려면 추가비용이 얼마가 필요하지 등등. 그래서 책이 한 권이라도 판매될 때마다 신기하기만 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고, 심지어 일 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다는 사람도 많은 현실이라 누군가에게 내 책을 사거나 읽어달라고 부탁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뜻밖의 사람이 먼저 사서 읽겠다고 하니, 고마운 마음이 더욱 컸다. 주인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며 미용실에 비치된 몇 권의 책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미용실 한편에 흔히 있는 여성 잡지가 아니라 시집이나 에세이, 신앙 서적들이 꽂혀 있었다.

여행을 즐기는 지인이 산티아고를 여러 번 다녀온 후 책을 세 권 냈다는 얘기도 했다. 책에 대한 이야기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1차 시술이 끝났다. 이제 한 시간쯤 후 중화제를 바를 것이다. 나는 집에 갔다가 한 시간 뒤 오겠다며 미용실을 나섰다.

내가 자리를 비운 한 시간 동안 주인은 바빴다. 우선 딸에게 전화로 부탁해서 교보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을 마쳤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책 정보를 소통 중인 단톡방 몇 군데에 올렸다. 단톡방을 열어 보여주며 이 중에 누구누구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니 분명 사서 읽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고 공감 폭탄을 한꺼번에 날렸다. 내가 다시 갔을 때 미용실 안에는 염색 시술 중인 여성 손님과 커트 시술을 막 마친 남성 손님이 있었다. 오랜 단골들인지 대화 주제도 옆집의 누구, 그 옆옆 집의 근황, 이런 얘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는 이미 다 들었어요.

나란히 앉아있던 여성분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주인은 손님 두 명을 상대로 내 책을 홍보하고 계셨던 것. 심지어 아직 책을 직접 읽기도 전에, 나에게서 전해 들은 책에 담은 내용과 주제,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전하며. 미용실에서 계획에 없던 북 토크라도 열린 기분이 들었다. 누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홍보를 해줄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 심지어 나는 그녀를 이제 두 번 봤다

.

시술을 다 마친 시간은 마침 미용실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뽀글뽀글하게 파마를 한 나와 새까맣게 새치염색을 한 오늘 처음 만난 여성 그리고 주인은 미용실 문 앞에서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요즘 계속해서 깜짝 선물을 받고 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 혼자서 애를 쓴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생각하지 못한 이들에게 응원을 받는다.

월급도 없는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친구, 우연이 아니라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겠으나 함께 했던 자리에서 책을 꼭 사겠다고 약속한 친구의 친구 미선 씨, 충동적으로 참여한 워크숍에서 만난 메이크업 강사님과 수강생 연희 씨. 그녀들은 다 읽고 나서 사인을 해 달라며 책을 가져왔다. 어떤 에세이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는 소감과 책을 읽으며 발견한 오타를 혹시 내 마음이 다칠까 조심하며 알려준 섬세한 이들. 누군가는 도서관에 희망 도서를 신청했고,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도서관에 기증했고, 작년에 알게 된 낭독 전문가는 에세이 한 편을 낭독해서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리고 오늘, 머리를 하러 간 동네의 작은 미용실 주인 역시 나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다.


그러니 이 길 위의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무언가 시도하고 최선을 다해 꿈을 완성하고 나면, 누군가 나타나 함께 걸어준다. 응원해 주고 등을 두드려 주는 귀인들. 자꾸만 귀인들이 내게 온다. 아주 많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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